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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세미 Jul 24. 2021

한여름 더위에 맞서는 수박 축제

: 시원한 수박으로 무더위 이기기

『수박 수영장』(2015)

글/ 그림 안녕달, (창비)




오늘도 폭염이다. 한낮의 기온이 36도를 웃도는 하루가 계속되고 있다. 에어컨을 틀면 나를 억누르던 열이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에어컨을 끄면 그 순간 사라졌던 열이 쏟아져 나타난다. 문을 열면 그 순간 뜨거운 공기 덩어리가 내 몸을 ‘훅’ 밀어낸다. 쏟아지는 햇살이 너무 사납기만 하다. 뾰족뾰족한 햇살이 어느 틈으로든 비집고 들어온다.




수박 수영장이 개장할 때가 되었다.


밀짚모자를 쓴 할아버지가 사다리를 가지고 와서 반 토막 난 수박 위에 올라섰다. 할아버지는 ‘석, 석, 석’ 수박 과즙을 헤집고 걸어가 수박씨 하나를 뽑아 밖으로 휙 던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 쏙 들어가 앉았다.



동네 아이들이 수영복 차림으로 ‘타닥타닥’ 수박 수영장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논을 가로지르고 빨래를 널고 있는 마당을 장난스럽게 지나가서 드디어 수박밭에 도착했다. 그 수박밭 한복판에 커다란 수박 하나가 반으로 쪼개져 놓여 있다. 더 이상 그것은 ‘수박’이 아니다. ‘수박 수영장’이 되었다. 햇볕이 수박을 익혀 쪼개어 놓았다. 누군가가 일부러 수박을 쪼개어 놓은 것이 아니다. 여름이 동네 사람들에게 수박 수영장을 선물했다. 이곳은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공간이다. 몸이 불편한 사람들도 함께 즐길 수 있다.



동네 사람들이 해마다 여름이면 무더위의 축제처럼 기다리는 수박 수영장이다. 작년에는 수박씨가 많아서 수영하기 힘들었다는 동네 할아버지의 걱정스러운 말 한마디가 올해 수박 수영장에 대한 기대감을 더 갖게 한다. 수박 수영장은 농촌체험을 하러 온 이방인들을 위해 열리는 축제가 아니라, 그 동네에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무더위를 함께 즐기기 위해 열린 축제다.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도 상업적으로 이용해 돈을 벌려는 것도 아니다. 단지 동네 사람들이 한여름의 소나기처럼 한여름의 무더위를 함께 시원하게 보내기 위한 것이다.  



아이들은 할아버지가 세워 놓은 사다리를 타고 수박 수영장에 올라갔다. 아이들은 튜브를 타고 신나게 수영도 하고, 수박을 잘라서 폭탄처럼 던지기도 하고, ‘철퍽철퍽’ 수박을 밟으면서 붉고 투명한 수박 물을 재미있게 만들었다.



수박 속에서 놀면, 수박의 달콤함이 알알이 온몸에 끈끈하게 붙을 것 같기도 하고, 갯벌처럼 질퍽한 느낌이 들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수박씨 자리에 누워 있는 모습이나 아이들이 신나게 놀고 있는 모습에서 설탕의 끈적함이나 갯벌의 질퍽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게다가 수박의 붉은 색조차 열탕이 아니라 냉탕처럼 느껴진다. 이들은 마치 시원한 계곡이 있는 차가운 냇물에서 놀고 있는 것 같다. 아마도 부드러운 색연필의 질감에서 느껴지는 원색 사이사이 살짝살짝 보이는 하얀색과 수박 수영장 속에서 ‘석, 석, 석,’ ‘타닥타닥,’ ‘철퍽’ 등과 같은 소리의 시각화가 청량감을 느끼게 해 주기 때문인 것 같다.



햇볕이 더 뜨거워졌다. 멀리서 구름 장수가 왔다. 구름 장수는 돈을 벌려고 온 것이 아니었다. 구름은 뜨거운 땡볕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 그늘과 비를 제공하여 사람들이 더 신나게 놀 수 있게 해 주려고 왔다. 그래서 구름 장수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다. 사람들은 줄을 서서 구름 장수가 주는 ‘구름 양산’과 ‘먹구름 샤워’를 이용했다. 솜사탕처럼 생긴 구름 양산은 아이들에게 그늘을 만들어 주었고, 먹구름은 시원한 물을 뿌려 주었다.



개인적으로 이 상상력이 이 그림책의 백미라고 생각했다. 실제 수영장에서 볼 수 있는 샤워 시설과 그늘막이라는 장치를 하얀 구름과 먹구름으로 설정한 것은 재미있는 상상력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읽는 사람도 그 수영장에 가볼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감을 갖게 한다. 아직 본 적은 없지만 시골 마을 어디선가 이런 샤워장과 그늘막이 있는 수영장이 있을 것 같은 생각이 순간 들었다. 이런 디테일한 장치들에 따른 설렘이 수박 수영장을 더 수영장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수박 수영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여름을 즐기고 있다. 밀짚모자 할아버지와 아저씨들이 힘을 모아 수박 껍질을 잘라서 미끄럼틀도 만들었다. 반으로 갈라진 두 개의 수박 사이에 미끄럼틀을 놓았다. 아이들도 어른들도 모두 함께 이 미끄럼틀을 재미있게 타고 놀았다. 이 수박 수영장에는 정해진 틀은 없지만 필요한 것들을 함께 만들면서 자신들의 놀이를 만들어 갈 수 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사라지지 않을 것 같은 더위가 해가 지면서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세상의 색깔도 변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에게도 더 이상 수박 수영장이 필요하지 않았다. 하나, 둘 수박 수영장을 떠났다. 붉고 투명하게 고였던 수박 물 위로 단풍잎과 은행잎이 떨어지고, 아이들이 만들어 놓은 눈사람과 빙산만 외롭게 덩그러니 남아 있다. 무더위가 사라지면서 수박 수영장도 문을 닫았다.



이 모든 것이 한 여름밤의 꿈처럼 조그만 상 위에 숟가락으로 파 먹은 수박 껍질만 놓여 있다. 이 빈 수박껍질이 놓인 그림을 보니 이야기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 이 그림책을 읽고 있는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여름이면 가족이 함께 모여 숟가락으로 수박을 파던 기억은 누구에게나 있을 법하다. 자르는 것이 귀찮아서든지, 화채를 만들려고 해서든지, 어떤 이유에서든지 간에 온 식구가 모여 함께 수박을 먹으며 시끄럽게 한 여름을 보낸 추억이 있을 것이다.



나에게도 그런 추억이 있다. 그때는 그것이 특별하지 않았다. 그저 나의 한여름에 별다른 일 아닌 일상이었다. 그래서 왜 모여서 그렇게 수박을 먹었는지, 그날 어떤 기분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더운 여름에 더위를 식히려고 함께 모여 수박을 먹었다. 우리 집은 엄마가 수박을 가지런히 잘라와서 하나씩 들고 먹었다. 수박 국물이 떨어지면 끈적거린다고 각자 접시를 하나씩 밑에 받치고 먹었다. 씨도 거기에 각자 뱉었다.


숟가락을 들고 함께 파먹은 기억은 화채를 할 때였다. 모두가 파내고 나면 거기에 후르츠 칵테일 통조림의 과일들과 사이다를 부었다. 먹을 때마다 그냥 먹는 수박이 더 맛있다고 생각했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기억은 함께 숟가락으로 싹싹 수박을 파먹은 이 그림책의 마지막 정서와는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이 기억이 어떤 날의 특별한 기억으로 의미를 찾게 하는 것이 아니라, 뿌연 이미지처럼 떠오르면서 마음 한편에 아련함을 느끼게 한다. 지금은 다섯 식구가 모여 앉아 함께 웃고 떠들었다는 그 이미지만으로도 웃음을 짓게 되고, 그 당시에 아무 의미 없던 일상이 추억이 된다는 것이 새삼 놀랍다.        



오늘 수박 한 조각으로 날려볼 이 더위도 나를 웃게 만들 날이 올 것이다.

    



<우리 아이의 한 줄 평>


‘수박 수영장이 진짜로 있다면 어떨까?’


나도 친구들과 함께 가서 신나게 놀고 싶다.

그리고 코코넛 수영장이 있다는 옆 동네도 가보고 싶다.      


우리 동네에는 라면 수영장이 생겼으면 좋겠다. 뜨겁겠지만 라면은 실컷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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