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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세미 Mar 08. 2022

일상이 유지되는 세상

: 가면을 벗고, 경계를 허물고

『애국자가 없는 세상』(2021)

권정생 시, 김규정 그림(개똥이)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평화롭다, 평화롭지 않다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오늘의 일상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살아왔다. 물론, 지난 2-3년 동안 코로나 팬데믹으로 일상의 의미가 좀 달라지기는 했다. 코로나 이전의 일상은 나의 선택에 따라 만들어졌다면, 코로나 이후의 일상은 나의 선택에 많은 제한을 두었다. 하지만,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 준 코로나 팬데믹(Pandemic) 조차, 그 일그러진 일상이 평화롭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하지는 않았다. 그저 모두가 견뎌내고 있는 ‘코로나(COVID-19)’라는 이 힘든 숙제를 함께 풀어가야 한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그 이상의 어려움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이상의 어려움이 찾아왔다. 일상의 의미가 변하는 것 이상의 어려움은 일상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전쟁을 통해 일상은 ‘평화’ 속에서만 어떤 모습으로든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또 한 번 피부로 느끼게 되었다.



20세기에 끝났다고 생각했던 전쟁이 비현실적으로 2022년 현재 일어났고, 상상할 수 없던 일들을 매일 겪으면서 일상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있다. 공습  경보가 정신없이 울리고, 사람들은 어디로 가야할지 막막하지만 몸을 피하기 위해 집을 나선다. 또 전쟁터로 뛰어드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모두 가족들과 헤어지며 기약 없는 약속을 한다. 자신들의 집으로 언제 돌아갈 수 있을지 알 수가 없다. 그들은 일상을 잃었다. 하루아침에 천지가 뒤바뀐 세상에 놓이게 되었다. 역사책에서나 볼 법한 일들이 오늘 그들 앞에 일어나고 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침략하는 사람들 중에는 침략의 명분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 침략자인 러시아 군인에게 홍차와 빵을 건네는 우크라이나 시민의 모습이 담긴 사진 한 장이 이 전쟁이 얼마나 의미 없고, 허무한 것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전쟁은 전쟁을 일으킨 ‘그 사람’만의 리그이다. 이유도 모른채 끌려온 러시아 군인의 일상도 잃었다.



어느 날 갑자기 전쟁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휴전상태에 놓인 우리나라에서 이 이야기가 남의 나라 것으로만 지나칠 수 있을까. ‘그 사람’만의 전쟁에서 우리의 모습을 본다. 한국전쟁 당시 총을 질질 끌고 내려왔던 인민군들, 밤이면 민가에 찾아와 먹을 것을 훔쳐 갔던 빨치산들, 인민군이 들어오는지 국군이 들어오는지도 모르고 인공기와 태극기를 양손에 들고 있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사진 한 장을 보는 그 짧은 순간에 머리를 스쳤다. 무엇을 위해 가족을 잃어가면서 서로에게 총을 겨누어야 하는 것인가. 국가의 이익이 일상의 행복을 누려야 하는 국민들의 하루보다 더 중요한가. 과연 자신의 목소리를 들어달라는 몸부림이 전쟁 밖에 없을까.




이 세상 그 어느 나라에도 애국 애족자가 없다면 세상은 평화로울 것이다라고 시작하는 권정생 선생의 시구가 떠올랐다.



2022년 우크라이나 땅에 전쟁이 나자, 결혼식을 앞당겨 올리고, 손에 총을 든 신혼부부, 국가를 위해 목검을 들고 훈련을 받는 민병대원, 가족들을 피난 보내고 혼자 남은 가장, 경기에서 이기고 자신의 조국이 자랑스럽다는 선수. 이들은 모두 전쟁으로 인해 애국자가 되었다.



권정생 선생은 평화로운 시대에는 젊은 사람들이 전쟁터에 나갈 필요도 없고, 무기를 만들 필요도 없고, 국방의 의무도 사라질 것이고, 부모들은 전쟁으로 자식을 잃고 가슴 아파할 일도 없을 것이다고 했다. 전쟁으로 소비될 그 시간에 젊은 사람들은 더 많은 것을 아끼고 사랑하며 살 것이고, 그로 인해 세상은 아름답고 따사로워질 것이라고 했다.



평화롭게 살자고 외치는 듯한 그 시 위에 김규정 선생이 상징적인 그림을 얹었다. 그림은 곰과 늑대가 지면을 하나씩 차지하고 질서정연하게 줄을 맞춰 있다. 서로의 영역이 분명하고 위협적으로 느껴질만큼 경직되어 있다. 이들은 차츰차츰 경쟁하듯이 무기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서로에게 겨누고 있다.



곰과 늑대는 각국의 이념을 상징하는 이미지였다. 곰과 늑대의 이미지 뒤로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이들 사이에 번데기가 생기면서 알 수 있었다. 나비의 번데기가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했던 그들의 균형을 깼다. 이 번데기에서 나비의 날개가 나오면서 곰과 늑대의 질서정연한 줄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곰과 늑대의 시선이 나비에게 쏠리면서 긴장해 있던 이들의 경계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나비는 아이들의 도움을 받아 날개를 펴기 시작한다. 날개를 활짝 편 나비가 하늘을 날자 그 아래 세상은 꽃밭이 되었고, 곰과 늑대도 나비를 따라 이 세상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로 적대하는 것이 의미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처럼 곰과 늑대의 가면을 벗은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은 나비처럼 자유롭게 움직이며 자신의 일상을 누리기 시작했다. 이미 이들은 덕지덕지 붙여진 테이프의 흔적이 남아 있는 찢어진 국기를 가진 국민이 되었지만 그래도 다시 일상을 회복하게 되었다.



폭격 소리가 들리는 우크라이나 한복판은 지금 비현실적인 겨울을 지내고 있다. 이제 그 얼어붙은 곳에 나비가 찾아들어, 자유와 평화가 다시 돋아나는 봄이 되기를 바란다. 전 세계가 일그러진 일상을 회복하는 것만으로도 지친 오늘, ‘애국자가 없는 세상’에서 모두 함께 다시 살아가기를 기대한다.




<우리 아이의 한 마디>

전쟁만이 국가가 ‘넥스트 레벨’로 가는 해결책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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