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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요아 Mar 09. 2021

사람이 운명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라면, 나는


다 틀렸다. 홍대와 합정 사이 어느 후미진 골목의 점집에서 들은 예언 대부분이 진실을 비껴갔다. "동생과 연을 끊으려는데, 언제가 좋을까요" 묻자 그는 대뜸 화를 내며 "오래 다정하게 지낼 것"이라 답했고, "어떤 직업을 가질까요?"라 물었을 때 그는, "도깨비를 쓴 김은숙 작가를 뛰어넘는 방송 작가"라 힘을 주었다. 인사할 때는 마무리로 "다음 남자 친구는 엄청나게 잘생기고 순한 사람이야." 라 중얼거렸다. 지나 보니 엉망인 인연이었다.


말마따나 훗날 '순하고 잘생긴' 인연을 만나거나 방송 업계에 들어갈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겠지만, 동생과 사별한 이 시점 그의 말을 회상하면 몸에 들었다는 신은 나를 만날 때 잠시 자리를 비웠나 보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쩜 평생 연이 끊기는 커다란 일조차 틀리지는 않을 테니.


카드를 받지 않아 계좌 이체를 했어도 좋은 얘기만 들은 덕에 상쾌하던 때를 떠올리면 점쟁이가 미워지다가도, 오히려 틀렸으니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든다. 그의 말대로 25살에는 대기업, 자비를 털어 29에는 대학원 입학, 32까지 쩔쩔매다 33살에 어렵사리 드라마 공모에 당선된다면 찰나의 기쁨 이후 어마어마한 허무가 밀려올 테다. '사람은 꼭두각시'라는 가설을 단단히 뒷받침하는 증거니.


이제껏 쌓은 가치관을 발판 삼은 선택은 물론, 숨 가쁘게 달려가다 크게 넘어진 시절과 그때 겪은 절망마저 철저히 계산된 누군가의 작품이라면 그 순간이야말로 속절없이 무너질 때다. 심리 테스트를 할 때마다 '안정 추구형'에 '계획파'가 항상 따라오는 나라도 정해진 미래는 못 견디겠다.


갑자기 사주와 인생을 운운하니 당황스러울 독자분을 위해 슬쩍 귀띔하자면, 엄마가 자꾸 동생의 운명을 합리화한다. 사별한 이를 만나는 방법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으므로 결국 할 일은 합리화밖에 없다는 걸 잘 알기는 하지만, 동생이 세상을 떠난 건 이미 정해진 운명이라 믿는 그녀의 혼잣말에 내 관심사도 자연스레 그쪽으로 향했다. 형편이 어려워 동생만 가짜 돌상을 차렸다고, 동생의 태몽에 검정 고무신을 신은 할머니가 나왔대도 그 모든 게 한 편의 시나리오처럼 완결을 위한 복선은 아니란 말이다.


그래, 맞은 점지도 많다. 엄마의 손을 잡고 들렀던 어느 제주 산골의 점집, 할머니는 나를 보며 사주에 책과 목탁이 끼어 있다고 했다. 또, 중학교 때 죽을 정도로 큰 교통사고가 날 테니 굿을 해야 한다고 말해 어린 나이 생쌀을 던진 기억이 생생하다.


그리고 중학교 2학년, 횡단보도에서 교통사고가 났다. 깁스한 채 꼼짝없이 누워야 했던 어느 여름이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사무치게 슬퍼한 이유는 친구를 못 만나서가 아니었다. 난생처음 겪는 고통에 아파서도 아니었다. 다만 처음 보는 할머니의 말이 맞아떨어졌다는 사실이 속상했다. 여섯 군데 수시 중에 딱 한 군데 붙은 곳이 불교 대학교의 문예창작과라는 사실도 숨 막혔다. 합격증을 들고 기뻐하던 내 앞에서 엄마는 "역시 그 할머니가 용하다니까."라며 기뻐했다.


그러니 용하다는 서울의 점집, 예약에 대기까지 참고 들은 예언이 결국 다 틀렸다는 건 나로서 아주 기쁜 일이다. 교통사고와 대학교를 맞춘 할머니의 말이라면 아마 한 달은 더 웃었으련만.


26살인 지금, 할머니가 말한 남은 예언 중 이루어지지 않은 건 딱 하나다. '20대에 결혼하면 30대에 이혼한다'. 틀리길 간절히 바라지만 그걸 증명한다고 아무와 결혼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말이지.


곧 그 할머니의 점집에 들를 예정이다. 최대한 많은 예언을 줍고, 예언이 모두 틀리기를 기원하며 정반대의 방향으로 뛰어갈 준비가 됐다. 사람이 정해진 운명대로 움직이는 존재라면, 나는 가장 말 안 듣는 꼭두각시가 될 테다. 손에 묶인 실을 잡아당겨 오른쪽으로 끌어도, 꿋꿋하게 왼쪽으로 기우는 인형으로. 누가 이기나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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