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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요아 Jun 08. 2021

퐁당퐁당 잠수법


직전 연봉이 그렇게 중요한가요?



면접관이 이십 분 늦은 것부터 속으로 마이너스를 죽죽 긋고 있었는데, 마케팅과는 전혀 관련 없는 연구 직원이 자기소개서를 들고 이렇게 물었다. 아직도 나는 무례한 낯에 침을 뱉지 못하는 성격이므로 건물을 나오자마자 담당자를 차단했다. '퐁당퐁당 잠수법'을 실행하는 날이다.


본가인 제주에 살며 가장 좋은 점을 꼽으라면 자연이 좋아서도, 사람 붐비는 지하철을 타지 않아도 되어서가 아니라 월세를 내지 않아도 돼서다. 하루 어치의 방세를 내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은 나를 조금 더 여유롭게 만든다. 말도 안 되는 연봉 후려치기를 당할 때 차라리 취업을 안 하겠다며 도망가고, 면접 때 혈액형을 묻는 유사 과학 신봉자에게서 뜀박질 친다. 통장에 돈은 없지만 월세를 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만으로 기업에 묶이지 않는다. 직무에 맞는 일자리를 위해 서울에 가고 싶다가도 값에 비해 말도 안 되게 열악한 방을 보면 아빠와 심하게 싸우더라도 결국 집에 머무는 쪽을 택한다.


돈이 없는데 월세까지 내야 할 때의 나는 잡플래닛 평점이 2점 이하인 걸 알면서도 블랙 기업에 스스로 걸어갔다. 입사와 퇴사를 너무 많이 반복해 사람들이 더 이상 면접자에게 관심을 주지 않는 기업에서 17층 창밖을 바라보며 '여기서 떨어지면 인턴의 불합리한 처우에 관심을 가져 줄까?'라고 고민했다. 함께 일하는 인턴 동기가 과중한 업무와 스트레스로 화장실에서 기절하자 퇴사할 마음을 먹었다. 돈이 없는데 고정된 지출은 어마어마할 때, 퐁당퐁당 잠수가 불가능한 날들이어서 나는 저렴한 값으로 스트레스를 치료하기 위해 매운 음식으로 속을 채웠다.


퐁당퐁당 잠수가 무엇이냐 묻는 분을 위해서 얘기하자면, 말 그대로 마음에 들지 않는 자리를 만나면 퐁- 하고 숨고, 괜찮은 사람을 만나면 당- 하면서 나타나는 철칙을 뜻한다. 시대에 뒤처져 아직도 여성과 남성을 나누는 농담을 하는 이를 만날 때, 계약서 상의 '갑'을 현실에까지 적용하는 게으른 권위주의자를 볼 때면 한마디 말도 없이 전화와 문자를 차단한다. 카카오톡도 내 프로필 사진을 볼 수 없게끔 세심하게 숨기는 건 덤이다.


2021년이나 되었는데도 감수성이 떨어지는 분들이 너무 많다. 심지어 꼰대라는 말이 유행한 뒤로부터는 자신이 꼰대가 아니라고 확신하는 꼰대가 늘어서 어디서부터 건드려야 할지 손을 쓸 수 없다. 처음에는 그런 이들을 만날 때마다 날카로운 말을 뱉어 상대의 잘못을 짚어야겠다는 신념으로 임했다.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아도 뒤를 도는 어른은 너무 매몰차다고 생각해서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다치고 지치는 건 나임을 뼈저리게 느꼈다.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말에 공감하지 않는 편이지만, 확실한 건 스스로가 인지하고 바뀌려는 마음을 먹어야만 가능성이 있다는 것. 그 뒤로 나는 퐁당퐁당 잠수법을 실행한다. 어느 날, 주변에 사람이 하나둘 떠나감을 느끼면 그때는 바뀌지 않을까 기대하며. 이미 나는 그분에게서 뒤돌아 멀리 사라지고 말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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