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적으로 다니는 병원이 있다는 건 안도감을 선사하지만 때로는 한 지역에 발이 묶인 듯한 답답함을 동반한다. 의사 선생님 앞에 앉으면 내 상황이 어떻고 기분이 어땠다는 말은 되도록 하지 않는다. 용기를 내어 내밀한 이야기를 전해봤자 듣는 사람이 바뀌면 내 이야기는 글자로 축소되어 종이에 적힌 뒤 다른 적임자에게 영어로 전달된다. 담당자는 내 증상을 다룬 문서를 읽고 약의 효과를 물었다. 메스꺼움은 없는지, 폭식은 줄었는지, 잠이 많이 오지는 않는지, 그런 질문에 그렇다거나 아니라고 대답하면 오 분의 시간이 끝나고 내 손에는 한 달어치의 약이 들려 있다.
약봉지에 약의 성분이 자세하게 적혀 있지만 약을 공부하는 힘은 남겨진 동생의 방을 치웠을 때 발견한 약의 종류를 알아버리는데 다 써서 나는 약봉지를 받자마자 쓰레기통에 버린다. 어차피 아침 약과 저녁 약이 작은 봉투에 구분되어 있으니 잘못 삼킬 걱정은 없다. 그러나 먹어도 되고 먹지 않아도 되는 불안할 때 먹는 약은 언제 어떻게 먹어야 할지 일 년이 흐른 지금도 모르겠다. 다른 약은 뭉텅이로 아침이나 저녁이라고 쓰여 있지만 그 주황색의 조그만 알약은 불안 시라고 쓰여 있다. 얼마나 불안한지, 불안한 건 어떤 느낌인지 알려주지 않고 투박하게 적힌 불안 시라는 글자에 나는 마음을 놓았다가 붙잡았다가 한다.
죽음을 고르는 선택지는 하지 않겠다고 지면에 공표했으면서 어제는 살고 싶지 않았다. 가까스로 응원의 댓글을 받고 나서야 내 편이 세상에 있다는 든든함을 기억하며 잠에 들었다. 오늘은 침을 삼키고 체중계에 올라갔다. 태어나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숫자가 체중계에 찍혔다. 원래의 나라면 블루투스로 연결된 스마트폰을 꺼내 기록을 지웠을 텐데 그럴 힘이 없었다. 아침은 기껏 샐러드로 먹어놓고 지운 배달 앱을 다시 깔아 칼로리 높은 음식을 허겁지겁 먹었다. 이제부터는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각오하며 눈을 감고 침대 속으로 기어 들어가 낮잠을 잤다.
대체로 잠을 자면 나아지건만 이번에는 잠을 오래 자도 나아지지 않았다. 점심마다 통화하는 연인에게 통화할 힘이 없다고 연락했다. 목울대를 울려 목소리를 꺼낼 힘이 없었다. 질투가 나서 펼치지 못한 책을 펼쳐 위안을 받았다. 역시나 때로는 내 마음을 듣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비슷한 마음의 책을 만나면 그곳에서 위안을 얻는다. 책을 읽으니 조금 나아졌지만 그래도 움직일 힘은 없었다. 쌓아둔 쓰레기를 버릴 힘이 없었고 괜찮아지면 답장하라는 연인의 메시지에 답장할 힘이 없었다. 온갖 힘이 사라지자 도망치고 싶었다. 세상과 약속된 일정을 무시하고 이불속에만 살고 싶었다. 불현듯 지금 불안 약을 먹어야겠다는 확신이 들어 얼음물에 약을 섞어 목 뒤로 넘겼다.
질투 나는 책을 꺼내 필사를 하다가 내 마음을 읊어주는 문장을 만나 힘이 차올랐다. 가령, "모든 노력과 정성이 물거품이 되는 느낌은 아무리 반복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라거나 "나는 종종 지금이 여름인지 겨울인지 헷갈린다. 내가 열셋인지 열일곱인지 헤아려 보다가 열아홉인 걸 깨닫고 화들짝 놀란다"라는 문장에서 내 마음이 실은 이런 결을 띄고 있었구나 싶어 도망치려는 마음을 붙잡는다. 아무리 힘들어도 꼬박꼬박 다녀오는 한 달 주기의 병원처럼.
의사 선생님에게 물어볼 수 있었다. 주황색 불안 약은 언제 어떻게 불안할 때 먹으면 되는 건지, 작은 불안과 나를 집어삼킬 만큼 커다란 불안을 도통 구분할 수 없다고 칭얼거릴 수 있다. 주황색 약을 삼킬 때는 주먹 만한 복숭아와 사과를 삼키는 듯해 목이 까끌까끌하다고 말할 수 있다. 다만 선생님에게는 수많은 환자가 있고 나는 고요하고 눈에 잘 띄지 않는 환자가 되고 싶어 묻지 않았을 뿐이다. 다음에는 가서 물어봐야겠다. 선생님, 불안 약은 언제 어떻게 먹으면 될까요. 아마도 똑 부러진 대답을 받지 못하겠지만 어느 때는 물어보는 경험으로도 한 걸음 나아간 듯한 기분이 든다. 여기까지 쓰고 보니 분리수거할 힘이 생겼다. 불안 약이 효력을 발휘한 것인지 책이 효력을 발휘한 것인지 내 마음이 효력을 발휘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약의 장점이자 단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