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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좀
물렁합니다

by 현요아


나만 해도 살짝 만졌을 때 스러질 것 같은 사람보다야 쿵쿵 두드려도 아무런 움직임 없을 것 같은 단단한 사람을 만나고 싶으니 단단한 사람이 되겠다는 이상향을 도무지 포기하려야 포기할 수 없다. 그런데 요즘은 자꾸만 세 번째 에세이 출간 투고를 거절당하고, 모두가 사직서를 품은 대퇴사 시대라는데 취업은 번번이 떨어져서 자존감이 천천히, 아니 급속도로 하락세 쪽으로 기운다. 어제는 홍대 거리를 걷는데 누군가가 누군가를 붙잡고 "안녕하세요."라고 말을 걸었다. 그 사람은 당연히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무시한 뒤 천천히 걸었는데 도리어 뒤를 걷던 내가 "당신은 안녕한가요."하고 답해주고 싶었다. 그러면서 잇따라 요즘의 내 고민을 털어놓는 상상을 했다. 이렇게 걸어 다니는 아무나 붙잡고 칭얼대고 싶은 마음이 가득한데 에세이스트라는 이름을 생각하면 언제나 단단하고 아늑하고 편안하고 여유로운 사람이 되어야만 할 것 같은 기묘한 마음이 든다.


이제까지 나름 방향성을 확고히 잡고 작가라는 길을 잘 닦아왔다고 자신했는데, 턱없이 부족한 원고료와 점차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 속에서 책을 읽어달라 호소하는 일이 지쳐만 간다. 이전에 창비에 마케터로 합격했을 때 갔어야 했나, 하는 후회도 많이 하는 중이다. 출판사를 다니면서도 충분히 글을 쓸 수 있었을 텐데 왜 그때는 그만두겠다고 호언장담을 했나 고민하다가 그때 다니면서 글을 썼으면 그토록 처절한 글은 나오지 않았으리라는 변명이 이어져 나를 사랑했다가 말았다가 한다. 연희문학창작촌에 가까스로 합격해 입주했는데 자꾸만 내 방이 아닌 것 같은 마음이 들어서 친구 집으로 도피한다. 내 방은 심지어 편혜영 소설가가 머문 방이라는데, 앞방은 김금희 소설가가 머문 방이라는데 나는 운으로 들어온 사람 같아서 출퇴근 카드만 찍고 쓰라는 동화는 도통 쓰지를 못한다. 이쯤 되면 글을 쓰기 위해 들어온 건지 글을 미워하려고 들어온 건지 알 수 없다.


작가는 직업이라기보다 상태여서 꾸준히 글을 써야 한다고 얘기했건만 요즘의 나는 물렁하고 물렁해 글을 쓰지 못한다. 세 번째 에세이를 번번이 탈락시키는데 이게 무슨 작가란 말이야 하고, 누군가의 글을 볼 자격이 있나, 하고 자책한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스스로를 미워하지 말라고 당당하게 얘기해놓고서는 나는 누가 볼세라 은밀한 곳에서 나를 미워한다. 왜 빠르게 성공하지 못하냐고 스스로를 닦달하고 이런 문장을 엮어놓은 글을 누가 출판해주겠어, 하고 안타까운 확신에 시달린다. 이제껏 내가 이뤄놓은 것들은 모두 운과 연 덕분인 것 같고 실은 스물일곱이 될 때까지 아무것도 이루어내지 못했다는 강한 마음이 들면 그때는 모든 걸 포기하고 싶어 져서 그 생각까지는 되도록 향하지 않으려는 편이다.


요즘은 좀 물렁하다. 기획 출판이야 거절당하면 자비 출판을 하면 되고, 취업이야 떨어지면 창업을 하거나 개인 사업자로 활발하게 활동하면 되건만 이제 나는 역류하지 않고 물의 흐름에 따라 유유자적 나아가고 싶은 것 같기도 하다. 원고를 다 써야 출판사에 보낼 수 있는데 나는 생각이 거꾸로여서 계약서를 먼저 쓰고 원고를 완성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처럼 튼튼하다. 브런치 북으로 대상을 받으면 출판사에서의 러브콜이 쏟아지리라는, 중쇄야 거뜬하리라는 마음을 가졌는데 모두 다 아니다. 영화 소울처럼, 틱틱붐에서처럼 나는 꾸준히 글을 써야 하고 그건 누가 보든 보지 않든 계속해서 작품을 탄생시켜야만 함을 의미한다. 이번 작품이 열렬한 호응을 받지 않아도, 기막힌 감탄사를 받아도 너무 우쭐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꿋꿋하게 글을 써 내려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뜻한다. 나는 어려서인지 부족해서인지 자꾸만 우쭐해지고 절망한다.


숱한 투고 끝에 한 출판사로부터 원고를 긍정적으로 검토해보겠다는 긍정적인 회신을 받았는데, 시간이 흐르니 딥해서 어렵겠다는 답변으로 흐지부지 끝났다. 그러면 그저 출판사와 내 글의 성격이 맞지 않구나 하고 단념하면 되는데 나는 아직 미숙해서 '내가 너무 우울해서 그래! 아무도 내 다음 책을 내주지 않을 거야!'하고 소리쳤다. 아무래도 요즘은 조금 물렁하다. 책을 읽는 독자님들에게는 다양한 선택지를 만들 능력이 있다고 말해놓고서는 나는 주어진 선택지가 없다고 칭얼댄다. 처음에는 이렇게 다채로운 면을 지닌 나를 이상하게 쳐다봤을 텐데 두 번째 책을 쓰면서 스스로를 많이 놓았다. 울적한 면도 나고 기쁜 면도 나다. 다정한 말을 베푸는 사람도 나고 내게 미운 말을 몰아 내보내는 사람 역시 나다.


오늘 아침에는 문득 영화감독이나 방송 작가의 세게로 들어가 볼까 고민했다. 취업도 투고도 이렇게 번번이 떨어지면 내가 직접 다른 세상으로 뚜벅뚜벅 걸어가버리겠다는 다짐이었다. 안정적인 정규직이 되고 싶다가도 인간의 삶에 안정이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과거의 일기장을 들춰 본다. 정규직이었을 때도 기업이 망할까 전전긍긍했고 책에 들어갈 원고를 쓸 때도 책이 망하면 어쩌냐는 걱정으로 스스로를 갉았다. 그런 내게 친구는 "늘 다음 단계를 준비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친구의 의도는 나쁜 게 아니었겠지만 좋게 들리지 않았다. 현재에 만족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이므로.


그래,


나는 늘 다음 단계를 준비한다. 언제나 조급하고 빨리 성공해야 한다고 머리를 뜯는다. 영원히 글을 쓰지 않겠다고 소리치면서 다음 날이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종이에 무언가를 끄적인다. 그 모든 면이 나다. 요즘은 좀 물렁하니 내일은 조금 단단해질 테다. 그러다가도 모레는 물렁물렁한 복숭아처럼 살짝 만져도 펑 터져버릴 수 있고. 요즘의 이런 물렁한 상태가 지속되어도 어쩔 수 없다. 삶은 해결과 성취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니까. 인간은 미성숙한 존재라 완전한 해결은 없다는 독자님의 말을 기억한다. 그러니까 이 글을 왜 썼냐면요, 저는 요즘 물렁해요. 어느 날 펑 터져버려도 그리 놀라지는 말아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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