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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루장 Jan 21. 2022

익숙함을 사랑하지 마라

내가 지금 사랑하는 사람도 처음에는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리움, 그저 그 단어만으로도 설렌다. 누군가를 그리워한 것이 언제였던가.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것은 내가 살아있다는 것이다. 누군가를 그리워도 하지 못하면 삶이 너무 팍팍할 것이다. 림태주는 “그냥 그리워서 흘러가는 거라고, 그리워하며 흘러가는 동안이 일생이라고 나는 생각했다”라고 한다. 누군가, 아니 무언가를 그리워하며 살아가는 게 인생일 거다.

그리움과 외로움은 이란성쌍둥이다. 외로워서 그리운 게 아니고 그리워서 외로운 게 아니다. 그렇지만 외로움과 그리움은 다르지 않다. “아무리 사랑해도 채워지지 않고, 사랑을 하지 않을 때도 외롭고 사랑을 해도 외롭다.”

외롭다
이 말 한 마디
하기도 퍽은 어렵더라만
이제는 하마
크게
허공에 하마
외롭다


지하의 연작시 ‘애린’중 일부이다. 외롭다는 말이 하기 어렵지만 허공에라도 외쳐야 한다. 외롭다를 그립다로 바꿔보면 림태주의 ‘미친 그리움’과 같다. 그리움을 그립다만 하지 말고 그립다고 말하자. 그리움은 사랑이다.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이다.

머뭇거리지 마라. 손가락 마디마디의 힘이 빠져나가 버튼조차 누를 수 없게 되는 가련의 날이 들이닥칠 것이다. 지금 전화를 걸지 않는 자, 가슴을 칠 것이다. 지옥에도 천국에도 로밍 서비스가 안 된다. 지금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는 자, 그러므로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머뭇거리지 마라. 지금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는 자,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지금 사랑하라.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는 후회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솔직해야 한다. 이기적으로 사랑을 택하는 것이 거짓말보다 낫고 어차피 상대 역시 거짓말이 거짓말임을 아는 한, 이기적인 선택이 가장 이타적인 선택이다. 지금 말하고 사랑하라. 잊고 있던 것을 일깨워 준다.

“나의 이 미친 그리움이 당신이 키우는 당신이 키우는 식물적인 그리움에 가서 비가 되고 햇살이 되고 시가 되었으면 좋겠다. 당신이 바람에 나부낄 때, 당신의 쓸쓸함을 어루만지는 우묵한 우정이었으면 좋겠다.” 그저 바람이 아니다. 벌써 나에게 다가와 지금 사랑하게 했다.

모르는 사람, 알 것 같은 사람, 알게 된 사람, 좋아하게 된 사람. 내가 지금 사랑하는 사람도 처음에는 모르는 사람이었다.

내 머리를 때리는 한 구절 “내가 지금 사랑하는 사람도 처음에는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저 글을 읽었을 뿐이고 사진으로 얼굴을 아니 스치듯 지나가도 나는 그를 알아볼 것이다. 그는 나를 모른다. 그래도 아무런 문제가 될 것이 없다. 처음에는 모르는 사람이었을 뿐이니.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_노희경

나는 한때 나 자신에 대한 지독한 보호본능에 시달렸다
사랑을 할 땐 더더욱이 그랬다
사랑을 하면서도 나 자신이 빠져나갈 틈을 여지없이 만들었던 것이다

가령 죽도록 사랑한다거나
영원히 사랑한다거나
미치도록 그립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내게 사랑은 쉽게 변질되는 방부제를 넣지 않은 빵과 같고
계절처럼 반드시 퇴색하며
늙은 노인의 하루처럼 지루했다

책임질 수 없는 말은 하지 말자
내가 한 말에 대한 책임때문에 올가미를 쓸 수도 있다

가볍게 하자 가볍게
보고는 싶지라고 말하고
지금은 사랑해라고 말하고
변할 수도 있다고 끊임없이 상대와 내게 주입시키자
그래서 헤어질 땐 울고불고 말고 깔끔하게, 안녕

나는 그게 옳은 줄 알았다
그것이 상처받지 않고 상처주지 않는 일이라고 진정 믿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드는 생각
너, 그리 살어 정말 행복하느냐?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죽도록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살만큼만 사랑했고
영원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나 당장 끝이 났다

내가 미치도록 그리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나 나를 미치게 보고싶어 하지 않았고
그래서,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사랑은 내가 먼저 다 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버리지 않으면 채워지지 않는 물잔과 같았다

내가 아는 한 여자
그 여잔 매번 사랑할 때마다 목숨을 걸었다
처음엔 자신의 시간을 온통 그에게 내어주고
그 다음엔 웃음을 미래를 몸을 정신을 주었다

나는 무모하다 생각했다
그녀가 그렇게 모든 걸 내어주고 어찌 버틸까
염려스러웠다

그런데, 그렇게 저를 다 주고도 그녀는 쓰러지지 않고
오늘도 해맑게 웃으며 연애를 한다
나보다 충만하게

그리고 내게 하는 말
나를 버리니, 그가 오더라

그녀는 자신을 버리고 사랑을 얻었는데
나는 나를 지키느라 나이만 먹었다
나는 나를 지키느라 나이만 먹었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모두 유죄다

자신에게 사랑받을 대상 하나를 유기했으니 변명의 여지가 없다
속죄하는 기분으로 이번 겨울도 난 감옥같은 방에 갇혀
반성문 같은 글이나 쓰련다


드라마 작가로 익히 알고 있는 노희경의 에세이집 제목이기도 하다. 이 글을 처음 본 것이 몇 년 전인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하지만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는 ‘가장 이기적인 게 가장 이타적이다’라는 말과 같다. 가장 이기적으로 사랑하라. 그래야 당신도 상대방도 행복하다. 상대방을 배려한다는 말도 안되는 핑계로 이별을 숙명으로 만들지 말자.


니가 행복해져야 세상도 행복해지는 거야. 마음 가는 대로 行하라


어쩌면 지금 사랑하지 못해 헤어지더라도 ‘우연’을 핑계로 ‘숙명’처럼 만날 수 있을지도 몰라. 지금은 헤어져도 우린 언젠가 다시 만날거야. 헛된 망상이다. 이별은 이별을 그리워하는 것으로 족하다. ‘버려주어서 고맙다, 그대’라고 20년 전을 돌아보며 노희경은 말한다. ‘나에게 네 자리가 없다’면서 미안해 하지마라. “사랑이 거래가 아닌 이상, 둘 중 한 사람이 변하면 깨져야 옳다.” 


인연이라는 만남도 있지만 

숙명이라는 이별도 있지

우리의 만남이 인연이었다면 

그 인연 또 한 번 너였음 좋겠어

어쩌면 우리 언젠가 또다시 

우연을 핑계로 만날지 몰라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라. 헤어짐을 반복해도 좋다.

사랑하고 헤어지고 또 사랑하면 된다.

익숙함에 익숙해지지 마라.

곁에 있는 그 사랑도 처음에는 모르는 사람이었다.

익숙함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하기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현재 사랑을 사랑하라.


덧_

《이 미친 그리움》, 림태주, 예담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노희경

《애린》, 김지하, 실천문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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