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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반지 0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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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빛그림 Oct 31. 2024

아무도 모르는 일_2

와이즈 교육 선생들은 수화 샘의 수려한 외모를 두고 이런저런 말을 많이 했다. 사실 수화 샘은 외모만 빼면 나랑 비슷했는데 친해지고 보니 더 그랬다. 나처럼 고시원에 살았고 맥주를 마셨고 가족이 없었다. 우리는 둘 다 사기를 당한 경험이 있었고 친구한테 배신을 당한 뼈아픈 기억도 있었다. 주부 교사가 대부분인 와이즈 교육에서 드물게 20대에 미혼이라는 점도 같았다. 다른 게 있다면 수화 샘이 임신을 했다는 것 정도였다. 임신이라니. 나라면 임신은 절대 하지 않았을 텐데. 확실히 그랬다. 고시텔에 살아서가 아니라 무서워서. 정확히 어떤 점이 무서운지 몰라도 나는 종종 임신이 무섭다는 생각을 했고, 어떤 경우든 그 경험이 좋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출산의 고통을 상상해서 무서운 건지, 출산 후에 맞닥뜨릴 상황이 두려운 건지 막연하긴 마찬가지였다.

수화 샘은 나보다 두 살 많은 스물여섯이었다. 평소에는 말이 별로 없지만, 할 얘기가 있을 땐 부드러운 목소리로 유려하게 했고 사무실 선생들이 지나치게 사적인 걸 물어도 정색하며 표정을 바꾸는 나와 달리 온화하게 웃었다. 얼굴은 누가 봐도 예쁘다고 했을 것이다. 피부도 하얗고 눈도 크고 치아도 고르고. 그냥 전형적인 예쁨이었는데 무던한 성격 때문인지 가끔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워 보일 때가 있었다. 와이즈 교육 선생들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몇 살이래?”, “뭐 하다 왔대?” 첫날부터 엄청난 관심을 보였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칭찬하는 말들을 주고받았다. 그것도 결국 한때였지만.

와이즈 교육에서 중요한 것은 누가, 얼마나 많은 회원을 거느렸느냐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지정 회원만 겨우 유지하는 수화 샘은 시간이 지나면서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그런 그녀가 다시 주목받게 된 것은 임신 때문이었다. 지국장의 생일날, 찬물을 끼얹듯 임신 사실을 알려 분위기를 애매하게 만든 수화 샘을 처음엔 이해하지 못했다. 나 같으면 다른 핑계를 대고 조용히 일을 그만두었을 텐데. 

그날 아홉 명의 선생들은 만 원씩 돈을 걷어 지국장에게 줄 케이크와 선물을 준비했다. 배 선생이 주문한 냄비 세트가 배송 지연으로 제날짜에 도착하지 않아서 막내인 내가 조그만 선물을 다시 사 와야 했다. 나는 회사 앞 꽃집에서 잎이 두툼하고 반질반질한 이름 모를 화초를 샀다. 은빛 리본이 묶인 갈색 화분을 사 오자 선생들은 돈 주고 그런 걸 샀냐며 못마땅해했다.

“덩치에 맞는 것도 샀다.”

배 선생이 농담이랍시고 던진 말에 기분이 몹시 상했다. 올여름에는 기어코 살을 빼겠다며 고가의 다이어트 식품을 할부로 주문하고 후회하고 있던 터라 더 그랬다. 어쨌거나 내 눈엔 화분이 냄비보다 나아 보였다.

선생들은 케이크에 초를 꽂고 불을 붙인 뒤에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다. 지국장은 (내심 기대하고 있었으면서) 생각지도 못했다며 기뻐했고 아침에 했던 연설을 다시 시작했다. 와이즈 교육을 ‘가열식 가습기’에 비유하는 연설이었다. (왜 하필 가습기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전기로 물을 끓여서 수증기를 내보내는, 자동으로 살균이 되고 가습이 되는 고급형 가습기. 와이즈 교육은 가열식 가습기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선생들의 에너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에너지는 자신에게서 나온다, 하루에 한 번씩 거울 속 나를 칭찬하라……. 세부 내용은 기분 따라 바뀌었지만, 결론은 하나였다. 신규 회원을 많이 끌어와야 한다는 것. 

“회원 관리에 만전을 기합시다!”

지국장은 큰 소리로 구호를 외친 뒤 아홉 명의 선생들에게도 한마디씩 하길 권했다. ‘당신에게 와이즈 교육이란?’, ‘국내 최초 어린이 과학 전문 자기 주도형 학습지를 뭐라고 홍보할 텐가.’ 그런 것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이번 달 계약왕이 누구더라?”

지국장이 찾는 ‘4월의 계약왕’은 다름 아닌 나였는데, 나는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아서 슬그머니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진짜로 속이 울렁거리기도 했다. 아침에 먹은 다이어트약 때문에 두통이 있었고, 커피를 연거푸 마셨을 때처럼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나는 화장실에 가서 손을 박박 씻고 치약 얼룩이 여기저기 튄 지저분한 거울에 몸을 착 붙이고서 옆머리에 난 새치를 뽑았다. 요즘 부쩍 흰머리가 늘고 있었다. 두툼한 팔뚝 사이로 땀이 고이는 것도 모른 채 순식간에 일곱 가닥을 뽑았다. 머리카락을 배배 꼬아 쓰레기통에 던지면서 올여름엔 반드시 66 사이즈 옷을 입겠다고 마음먹었다. 

내가 다시 사무실로 돌아갔을 땐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임신 얘기가 어떻게 나오게 됐는지 모르지만, 생일 파티의 화기애애함은 사라지고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아 눈치를 봐야 할 정도였다. 수화 샘은 지국장과 함께 학부모 상담실에 앉아 있었다.

“왜 저래요?”

나는 통유리로 된 상담실을 가리키며 물었다. 옆자리를 쓰는 배 선생은 엄청난 비밀을 누설하는 것처럼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소곤거렸다.

“임신했대.”

“네?”

“우리 아무도 몰랐잖아. 결혼도 안 했다는데.”

“누가요?”

“이수화 선생이 몇 살이지? 스물여섯이지? 일곱인가? 근데 저렇게 고집이네…….”

“무슨 고집이요?”

“일을 계속하겠다고.”

“그게 왜요?”

“뭐가 왜야?”

배 선생이 답답하다는 듯 되물었다.

“일하는 거랑 상관없잖아요.”

“아, 일을 어떻게 해. 결혼도 안 한 선생이 임신해서 돌아다니면 회사 이미지가 퍽이나 좋겠다.”

“풉, 이미지래.”

내 말에 배 선생의 설교가 이어졌다.

“소문이 얼마나 무서운지 몰라? 결혼도 안 했는데 임신해서 돌아다니면 학부모들이 가만히 있을 것 같아? 자기는 아직 어려서 세상을 몰라. 애초에 조심성이 있었으면 이런 일도 없었겠지. 결국 누구 잘못이야? 누구 손해냐고. 여자는 늘 자기 몸을 살피고 보호해야 하는 거야. 아무리 세상이 바뀌었다고 해도 여자는…….”

나는 샐쭉한 표정으로 수화 샘에게 눈길을 돌렸다. 하나로 묶은 긴 머리가 등 뒤에 얌전하게 내려앉은 옆모습이 보였다. 저만큼 머리를 기르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3년? 4년? 나는 한 번도 머리를 길러본 적이 없었다. 엄마는 항상 머리가 길었고, 내게도 머리를 기르라고 권했지만, 아침마다 샴푸를 두 번씩 하고 수건을 두 개씩 쓰고 드라이어로 요란하게 말린 뒤에도 여전히 젖어 있는 머리를 빗는 일은 누가 돈을 줘도 하기 싫었다. 허구한 날 수챗구멍을 틀어막는 긴 머리카락을 고무장갑 낀 손으로 잡아 뽑는 것도. 엄마는 성가신 일이 있으면 은근슬쩍 외면하는 사람이라서 그런 일은 무조건 내 몫이었고, 그게 집을 나온 유일한 이유는 아니지만 확실한 이유 중 하나이긴 했다.

점심시간이 끝나자 선생들이 하나둘 오후 수업을 나갔다. 수화 샘도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민망했을 텐데도 자신의 몫으로 덜어놓은 케이크를 천천히 다 먹었다. 은박 접시에 담긴 케이크 조각을 나무젓가락으로 헤집어 연두색 포도 한 알과 함께 입으로 쏙 집어넣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나도 모르게 내 몫의 케이크를 들고 수화 샘 자리로 갔다.

“이것도 드실래요? 저는 다이어트 중이라서 먹으면 안 되거든요. 먹으면 후회해요.”

내가 불쑥 케이크를 내밀자 수화 샘이 놀랍다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표정은 그랬어도 내가 내민 접시를 받았고 싱긋 웃으면서 “고마워요.” 하고 인사를 건넸다.

“보영 씨는 오후 수업이 몇 시예요?”

수화 샘이 물었다.

“두 시요. 왜요?”

“점심 같이 먹으려고요.”

수화 샘은 그렇게 말하고 곧 덧붙였다.

“다음에요. 보영 씨가 먹고 싶을 때.”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다음 날 수화 샘과 밥을 먹었고, 우리는 그날 이후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누군가와 그렇게 빠르게 친해진 건 다단계에 몸담고 있던 고등학교 친구 이후로 처음이었다.

수화 샘은 할 줄 아는 게 많았다. 회원 모집에만 서툴렀지 말도 잘했고 책도 많이 읽었고 기억력도 뛰어나 책에서 본 내용을 외워서 들려주기도 했다. 요리에도 소질이 있었는데, 그건 내게도 좋은 일이었다.

“고시원에 산다고 해서 요리하지 말란 법은 없잖아.”

수화 샘은 통장에 만 원이 있으면 만 원을 다 쓰는 사람이었다. 특히 먹는 데 돈을 아끼는 법이 없어서 공용 주방에서도 월남쌈이나 밀푀유나베 같은 번잡스러운 요리를 해 먹었다. 같이 밥을 먹은 뒤부터 수화 샘은 내가 사는 고시텔로 자주 왔다. 요리를 할 수 있는 환경이 잘 갖추어져 있다는 이유였다. 공용 주방을 야무지게 사용하는 수화 샘의 손에서 별 볼 일 없던 냄비와 프라이팬은 제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그동안 여러 고시텔을 전전하며 살았지만 이렇게까지 다양한 재료를 준비해 자리를 차지하고 조리에 몰두하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 손쉽게 할 수 있는 달걀찜이나 된장찌개, 만둣국은 물론이고 어느 날에는 냉동 만두가 비싸다며 아예 만두를 빚기도 했다. 두부와 부추를 잔뜩 넣은 소를 만들고, 손바닥 위에서 동글동글하게 만두를 빚는 수화 샘을 보고 있으면 ‘언니’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나에게도 언니가 있었다면 이불 속에서 소곤대고 킥킥대다 잠드는 동화 같은 밤이 있었을까. 어떤 비밀을 털어놓아도 마음이 놓이는 행운을 누렸을까. 그건 어디까지나 내가 만들어낸 환상이라는 걸 알면서도 ‘자매’라는 단어에 자꾸만 의미를 부여하고, 마치 진짜 언니가 생긴 것처럼 착각하곤 했다.

“배고플 때 꺼내서 쪄 먹어. 두부랑 채소만 넣었으니까 살도 안 찔 거야.”

수화 샘은 만두를 넉넉하게 만들어 지퍼 백에 다섯 개씩 담아 냉동실에 얼려놓았다.

그날 이후 나에게는 새로운 습관이 생겼다. 누가 만두를 훔쳐가지 않았는지 확인하느라 냉장고 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는 습관. 나를 위한 음식이 저 안에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든든해지는 새로운 경험이었다.

5월인데도 이상하게 기온이 높았다. 낮에는 한여름처럼 무더워서 조금만 움직여도 쉽게 지쳤다. 수화 샘과 나는 마트에서 참외를 샀다. 내가 마트에서 사는 과일은 참외가 유일했고, 주로 6월이나 7월, 본격적으로 여름이 시작될 무렵이었기 때문에 이번 참외는 무척 이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난 수박이 좋더라.”

수화 샘은 검은색 줄이 선명하게 박힌 커다란 수박을 골랐다. 나로서는 한 번도 사본 적이 없는 과일이었다.

“다 먹지도 못할 텐데…….”

“같이 먹으면 금방 없어져.”

수화 샘은 수박을 먹기 좋게 잘라 네모난 통에 넣어두었다가, 밥을 먹은 뒤에 조금씩 꺼내 먹었다. 옆자리에서 밥을 먹는 사람이 있으면 “한 조각 드셔보실래요?” 말을 붙이며 종이컵에 몇 조각 덜어주기도 했다. 수화 샘은 수박을 잘 다루었다. 과일을 잘 다룬다는 게 말이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수박을 다루는 손길이 남달랐다. 수박 껍질로 담근 장아찌를 작은 유리병에 나누어 담아 와이즈 교육 선생들에게 나누어줄 정도였으니까. 돈이 전혀 아깝지 않을 정도로 깨끗하게 수박의 흔적을 없앴다. 수화 샘이 불평 아닌 불평을 한 것도 수박을 손질하면서였다.

“이 고시원은 다 좋은데, 칼이 너무 안 들어.”

식칼이라고 부르기에는 어딘지 빈약한 중간 크기의 칼이었다.

“이렇게 무딘 칼이 손을 다치게 하는데.”

칼을 내려다보는 수화 샘의 표정이 하도 진지하기에 “칼을, 하나 살까요?” 하고 물었다. 칼을 사면 어디에 보관해야 할까? 공용 부엌에 두면 사람들이 함부로 쓸 텐데. 내 서랍에 두어야 하나. 식칼을? 속으로 그런 고민을 하고 있는데 의외로 수화 샘은, “칼을? 칼을 왜 사? 네가 필요하면 사. 근데 굳이 칼을? 왜?”라고 말해 나를 어이없게 했다.

수화 샘의 태도가 전부 이해되는 건 아니었지만 수화 샘같이 예쁜 사람이 가족처럼 나를 챙기고 위하면서 내가 조금이라도 짜증을 부리면 기분을 풀어주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싫지 않았다. 시내에 같이 갈 사람이 있는 것도 오랫동안 잊고 지낸 기쁜 일 중 하나였다. 수화 샘이 꾸미는 데 돈을 쓰는 일은 좀처럼 없었지만, 내가 옷을 사러 갈 땐 기꺼이 함께 가주었다. 옷감이나 바느질 자국을 눈여겨보고 흠집을 발견하면 당당한 태도로, 나라면 절대 할 수 없는 물건값을 흥정했다.

“모든 물건에는 제값이 있는 법이거든.”

여름이 시작되고, 살이 조금 빠졌다고 생각되었을 때 나는 처음으로 사무실에 치마를 입고 갔다. 무릎 위로 올라오는 데님 주름치마였다. 수화 샘이 아니었다면 사는 순간 옷장 안으로 들어가 영영 나오지 못할 옷이었다.

“너랑 잘 어울린다. 완전 날씬해 보여.”

사무실 선생들은 내가 치마를 입었다는 사실도 모르다가 수화샘의 활력 넘치는 목소리에 나를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나에게 살이 많이 빠졌다고, 조금만 더 빼면 되겠다고, 살도 젊을 때 빼야 한다고 한마디씩 했다. 그런 말을 들었다고 내가 갑자기 날씬해졌다거나 예뻐졌다거나 착각을 한 건 아니지만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것이 전처럼 두렵지 않았다. 수화 샘이 아니었다면 경험하지 못할 낯선 변화였다.

“보영아, 너는 귀한 존재야.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수화 샘은 모든 말에 진심을 담아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낯 뜨거우면서도 귀 기울여 내 이야기를 듣고, 진심으로 나를 위하는 존재가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뻐근해졌다. 당연히 누구라도 수화 샘을 좋아할 것 같았는데 의외로 수화 샘의 회원 수는 전혀 늘지 않았다. 오히려 있던 학생마저 떨어져나가 지국장한테 불려가는 일이 잦은 건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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