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문 앞에 상자가 놓여 있었다. 신발 상자보다 약간 큰 상자에는 택배 회사의 송장 대신 ‘김보영’이라는 이름 석 자만 덩그러니 적혀 있었다. 발신인이 없음에도 나는 자연스럽게 수화 샘을 떠올렸다. 이런 식으로 택배를 놓고 갈 사람은 수화 샘밖에 없었다. 멍한 표정을 한 수화 샘의 얼굴이 아련하게 떠오르다가 이내 사라졌다. 수화 샘과 마지막으로 통화를 한 게 언제였더라.
상자는 묵직했다. 섬뜩한 직감이 드는 상자를 방으로 가져가고 싶지 않았다. 이런 상상이 과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 안에 토막 난 시체나 유기된 신생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괴한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며칠 전에 본 기사 때문일까. 분리배출장에 버려진 사산아에 관한 기사를 처음 읽은 건 우연이었지만, 그와 관련된 기사를 전부 찾아 읽은 건 내 선택이었다. 나는 그 사건이 나와 무관하지 않다고 느꼈다. 도대체 누가 그런 사건과 무관할 수 있을까. 기사의 말미에는 태아는 사체가 아니기 때문에 버린 사람이 처벌받지 않는다고 적혀 있었다. 기사에 의하면 사체 유기는 진짜 시체나 유골을 유기할 때 성립하는 죄이고, 사산아는 사체에 해당하지 않으니 태아를 버린 일은 법으로 처벌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법이 그렇다는데도 한동안 기분이 께름칙했다. 그 이유가 루시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내 이름이 적힌 상자를 받고서야 하게 되었다.
상자를 방으로 들이기 싫다고 해서 딱히 둘 곳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마치 누굴 기다리는 사람처럼 고시텔의 현관 앞을 기웃거렸다. 저녁이 되자 침침한 형광등 아래로 하루살이들이 모여들었다. 곧 방충등이 켜질 것이고, 딱딱 소리를 내며 벌레들이 죽을 것이다. 영문 모를 불쾌한 소리에 먹히듯이 맞이하는 죽음의 순간. 고시텔에서는 그런 순간조차 보잘것없이 치워진다. 나는 죽음에서 도망치는 것처럼 서둘러 발길을 돌렸다. 같은 건물에 사는 사람 중에 인사를 나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이 유감이었다.
수화 샘은 내가 사는 고시텔의 비루한 부엌을 부러워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조리 도구가 변변치 않은데도 오이김치나 가지볶음 같은 요리를 뚝딱뚝딱 만들고, 밥을 먹은 뒤에는 과일이나 아이스크림 같은 후식을 꼭 챙겨 먹었다. 수화 샘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공용 주방이 따스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마지막 통화를 한 뒤로는 발길을 완전히 끊어버렸지만.
저녁 시간이 다 되어가는데도 주방은 텅 비어 있었다. 누군가 방금 사용한 것처럼 보이는 칼 한 자루만 조리대에 얌전하게 놓여 있을 뿐이었다. 칼에 묻은 불그스름한 과즙의 흔적이 붉은 꽃처럼 보인 것은 기분 탓이었으리라. 나는 씻지 않은 칼을 그대로 상자에 가져다 댔다. 쉽게 찢길 줄 알았던 테이프가 생각보다 두꺼워서 칼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손에 힘이 실렸다. 그 순간 칼이 제멋대로 비켜나가면서 왼손의 집게 손가락 윗부분을 스쳤다. 아프지는 않았는데 칼이 스친 부분에 선홍색 피가 맺혔다.
“무딘 칼이 손을 다치게 하는 건데.”어디선가 수화 샘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왈칵 눈물이 날 것 같았는데, 눈물은 한 방울도 나지 않고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졌다. 에어컨이 꺼져 있는데도 실내가 서늘했다. 여름이 지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