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진은 깨끗하게 닦인 머그잔을 꺼냈다가 마음을 바꾸어 사장이 쓰는 (정확히 말하면 쓰지는 않고 아끼기만 하는) 컷글라스를 하나 꺼냈다. 도요사사키인지 도도사사키인지를 카피했다는, 전 여친이 선물한 컵 세트에 사장은 손도 대지 않았다. 새것의 상태로 두면 언젠가는 사랑하는 사람이 돌아올 거라고 믿는 건가? 수진은 막연하게 상상하면서 칼집이 아름답게 아로새겨진 유리잔에 얼음을 가득 채우고 그 위에 콜라를 부었다. 컵이 얼마나 예술적으로 생겼는지와는 아무 상관없는 탄산 알갱이가 가열 차게 터져나가는 동안 얼음은 덜그럭 소리를 내며 자리를 옮겼다. 판매용 캔 음료에 손댄 걸 알면 싫어하겠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호기로웠다.
반지의 위력인가.
수진은 내친김에 찬장의 맨 아래 칸에 북파공작원처럼 숨어 있는 위스키 병들 중에서 (더 비싼 것도 있었지만) 30년산 글렌피딕을 꺼냈다. 사장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아주 조금만 따랐다가 좀 더 따랐다. 수진은 두 액체가 완전히 섞이기도 전에 일단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또 한 모금. 희미한 위스키 향이 콧구멍에서 목구멍으로 하강하듯이 미끄러지는 걸 음미하고 난 뒤에야 비로소 ‘마시면 안 되는구나···.’ 하는 사실을 깨달았다.
수진은 자신이 임신 중이라는 사실이 도무지 실감 나지 않았다. 실감이 나지 않는다고 해서 없던 일이 되는 건 아니었고 수진도 그 사실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참 슬픈 일이었다. 아이가 생겼다는 게 슬프다는 게 아니라 일어난 일은 일어난 일이라는 게 슬펐다. 이미 써버린 시간은 되돌릴 수 없고, 방향을 바꾼 길은 앞으로 예상치 못한 길만 열어줄 것이며, 기대는커녕 원치 않은 길만 골라줄 것을 알기에 슬픈 것이었다.
수진은 잔을 내려놓았다. 위스키는 이제 콜라와 완전히 섞여 그 색도 향도 알아볼 수 없었다. 약간 밝은 갈색과 진한 갈색, 두 층위가 있었는데 어느새 차이는 감쪽같이 사라지고 평범한 콜라로 돌아와 있었다. 그 안에서 뭔가 발견하려는 것처럼 글라스 안을 들여다봤지만 당연히 그 안에 수진이 보고자 하는 건 없고 그냥 콜라와 얼음과 위스키가 섞인, 일정한 형태는 가졌으나 일정한 부피는 갖지 못한 응집력 없는 물질이 담겨 있을 뿐이었다.
그때 출입문 열리는 소리가 나면서 누군가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사장의 인기척은 아닌 것 같더니 사장의 누나인 백영해가 서 있었다.
“덥다, 더워. 에어컨도 안 틀고 뭐 해?”
아직 이른 시간인데도 백영해의 분홍색 긴팔 티셔츠는 많은 부분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백영해는 오이와 양파 따위가 든 이미 수차례 쓴 것이 분명한 낡은 쿠팡 프레시백을 배식구 위로 밀어 놓더니 홀로 나가서 에어컨을 틀었다. 2인용 테이블 세 개와 4인용 테이블과 6인용 테이블로 꽉 찬 공간은 그리 크지 않아서 금방 서늘해질 것이었다. 수진은 시간을 확인했다. 일곱 시 사십 분. 아직 영업 시작까지는 삼십 분 가량 남아 있어 그렇게 서둘러 에어컨을 가동시키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주인이니까 마음대로 하라지. 수진은 전혀 덥지 않았다.
“얘는 아직 출근 안 한 거야?”
“오늘 좀 늦는다고 하셨어요.”
사장과 백영해는 남매였지만 성이 달랐고, 나이 차이도 열 살 이상 났다. 사장이 온갖 멋을 내는 반면 누나 쪽은 더할 나위 없이 안 꾸미는 스타일이어서 남매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사장이 무채색 계열의 옷만 고집하는 반면 백영해는 주머니 달린 작업복 바지에 화려한 색상의 상의를 즐겨 입었고 머리에는 야구모자든 털모자든 귀도리든 반드시 뭔가를 둘러썼다. 사장은 완전히 쓰지도 벗지도 않은 모자의 상태를 질색하면서 그 패션은 정말 아니지 않냐고, 동의를 구했지만 수진의 눈엔 그게 그렇게까지 거슬리지는 않았다.
“보아하니 오늘도 푹푹 찌게 생겼다. 5월부터 이러면 어떻게 사니.”
수진은 차가운 물을 한 잔 따라서 건넸다.
“그래, 오늘은 또 왜 늦는대?”
백영해가 모자를 살짝 들어 올리며 물었다.
“메뉴 때문이라고 한 것 같아요.”
“메뉴? 메뉴가 왜?”
“메뉴를 개발해야 할 것 같다고···.”
백영해는 물을 다 마시고 빈 잔을 수진에게 주었다.
“놀고 있다. 있는 거나 잘 하라 그래. 그치?”
수진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지만 백영해의 말이 백번 맞는다고 생각했다. 알바를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수진은 사장의 사업 수완이 그다지 뛰어나지 않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역시나 가게의 모든 것은 누나인 백영해가 일군 것이었고 건강이 안 좋아져 사장에게 운영을 맡긴 상황이었다. 사장은 특별한 직장 없이 주식으로 일정한 수입을 만들며 요가와 도자를 -취미치고는 진지하게- 배우러 다니는 사람이었는데 편의상 직업이 있는 척하기 좋겠다는 이유로 제안을 받아들였다. 백영해는 가게를 넘긴 뒤로 호수 옆에 있는 텃밭을 분양받아 야채를 직접 재배하고 마크로비오틱 요리를 연구했다. 이따금 양파나 배추 같은 걸 들고 와서 채소는 뿌리부터 머리까지 전부 먹어야 한다며 조리법을 가르쳐주었는데 조금 귀찮긴 해도 수진은 그 시간이 재미있었다.
“바쁜 거 아니지?”
조리법을 가르쳐줄 줄 알았던 백영해는 주방의 뒷문을 열더니 담배를 꺼냈다.
“한대만 피울게. 요즘 진짜 피울 데가 없어. 심지어 텃밭에서도 못 피운다.”
백영해는 주방의 뒷문으로 난 좁은 계단참에 걸터앉았다.
“잔인하지 않니.”
“뭐가요?”
“흡연 말야. 그렇게까지 억압할 일이냐고.”
“아. 근데 피우셔도 돼요? 병원에서···.”
백영해는 애매하게 웃으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결국 내 마음 아니겠어?”
그러고는 조리대에 있는 콜라 잔을 가리키며 말했다.
“너도 그거나 마셔. 얼음 다 녹겠다.”
어느새 얼음이 녹아서 투명하게 콜라의 표층을 덮고 있었다. 수진은 새로 생긴 물의 층위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액체의 윗부분은 미세한 진동을 받는 것처럼 조금씩 계속 떨렸고 한시도 멈추지 않았다.
“그 컵 오랜만이네. 커팅을 직접 했다지. 칼집이 예술이긴 해. 술맛 나게 잘 만들었어. 그거 아직도 끔찍하게 아낄걸?”
앞치마를 두르려던 수진은 마른 사래가 나올 뻔했다.
“아, 이게요… 제가 꺼낸 건 아니고… 아니 꺼내긴 했는데 보기만 하려고 잠깐···.” 수진이 버벅거리자 백영해는 컷글라스에 대한 관심은 끝났다는 듯 갑자기 옛날 얘길 꺼냈다. 자신이 뉴욕에 살았던, 10년 전 시절의 이야기였다.
“내가 거기서 애 봐주는 일을 했잖아. 갓 태어난 아기들 있지? 신생아.”
수진은 이야기를 듣기도 전에 백영해가 하려는 얘기가 ‘미드 타운 아기 엄마’이야기라는 걸 알았다. 20일 된 아기를 두고 고층 아파트에서 뛰어내리려고 했던 젊은 여자의 목숨을 구한 이야기. 전에도 몇 번 들은 적이 있었다. 그 사건의 하이라이트는 백영해가 베란다의 위가 아닌 아래쪽으로 손을 뻗어 여자의 손이 아닌 몸을 꼭 붙든 것이었다.
“몸을 꽉 껴안았으니 망정이지 손을 잡았으면 그대로 떨어졌을 거야. 내가 생각해도 참 영리했지. 순발력이 있었어. 집에 들어가자마자 공기가 이상한 걸 알아챘거든.”
수진은 조용히 앞치마를 매고 머리를 묶은 다음 글라스에 있던 콜라를 개수대에 따라 버렸다.
“수진아, 네가 지금 미국 나이로 몇 살이지? 스물여섯이던가?”
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생일이 안 지났으니 따지자면 스물다섯이겠지만 한국 나이고, 미국 나이고 무슨 상관이겠나.
“그 애기 엄마가 딱 네 나이였는데. 일 그만두고 딱 한 번 더 봤거든?”
백영해는 브롱스크에 있는 도넛 가게에서 우연히 그 여자를 다시 봤다. 백영해는 여자를 한눈에 알아봤고 여자도 자기를 알아본 것 같은데 아는 척은 하지 않았다고 했다. 도넛 가게는 테이크아웃을 전문으로 하는 곳이라 매장 안이 지저분했다. 테이블은 두 개뿐이고 그마저도 위에는 신문이며 자동차 열쇠며 주인의 잡동사니가 산만하게 놓여 있어 선뜻 앉고 싶은 자리는 아니었다. 백영해가 거기에 앉아 있었던 것은 그곳에 일자리를 구하러 간 것이기 때문이었다. 백영해는 대충 통성명이나 하면 될 일이지 왜 사람을 기다리게 하나 싶으면서도 앉아 있었는데 그때 마침 출입문이 열리더니 허름한 도넛 가게와는 영 매치가 안 되는 멋쟁이가 들어온 것이다. 레이스와 프릴이 풍성하게 달린 핑크 드레스를 입은 여자는 신이 난 목소리로 통화를 하고 있었다.
“나를 못 본 것 같더라고. 처음에는.”
여자는 도넛 진열대 옆에 놓인 쟁반을 들어 딸기 도넛과 오리지널 도넛을 각각 두 개씩 담아서 계산대로 가져갔다. 그쪽으로 가려면 어쩔 수 없이 백영해가 앉은 테이블을 지나게 되어 있었는데 통화에 열중하느라 백영해의 존재를 못 알아챘던 여자는 백영해와 눈이 마주치고 화들짝 놀라더니 도넛을 쟁반째 떨어뜨리고 가게를 나가버렸다.
“그걸 내가 다 치웠다.”
수진은 샌드위치 빵을 종류별로 분류해서 브레드 박스에 넣으면서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백영해는 말없이 한동안 담배만 피웠다.
“왜 그냥 나갔을까요?”
수진이 물었고, 백영해는 잠시 생각하는 것 같더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그 여자의 뭔가를 건드리지 않았나 싶어. 신나는 기분에 찬물을 확 끼얹는 짜증 나는 뭔가를. 죄책감이나… 수치심 같은 거일 수도 있고. 갑자기 과거의 인물이 등장해서 초를 친 거지.”
백영해는 계단참에 담배를 비벼 끄고 꽁초를 자신의 케이스에 챙겨 넣었다.
“오늘따라 그날 기억이 나서 주절거려 봤어. 요즘 내가 불면이 좀 있어서 새벽에 깨어 있거든. 가만히 앉아 있으면 이 생각 저 생각이 나. 그러면 당연히 잘한 일이라고 여겨 온 것도 후회가 들고 후회되었던 일도 괜찮아지더라. 잠이 안 오니까 별 쓸데없는 생각을 다 하는 거지. 웃긴 건 결론은 내가 왜 이렇게 살고 있나. 이게 내가 원하는 삶이었나. 하는 의문으로 끝난다는 거야. 처음엔 되게 우울했는데 새벽에 나와서 텃밭에 있는 상추랑 토마토 같은 걸 보면 기분이 나아지긴 해. 아침부터 별 얘길 다 했다. 그러려니 해.”
수진도 처음엔 백영해가 별 얘길 다한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요리를 배우는 게 낫겠다고. 그런데 막상 얘기를 듣다 보니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휘몰아쳤고 백영해가 불면 얘길 하자 왈칵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당연히 눈물은 안 나왔지만 말을 하고 싶은 욕구가 저 밑바닥에서부터 강렬하게 올라왔다. 저도 불면이 있고 하루하루 사는 게 너무 힘들다고. 뭘 해야 할지 모르겠고, 샌드위치를 만드는 일은 좋지만 죽을 때까지 이 일을 할 수 없는 건 안다고. 미래가 있어야 기쁨이 있고, 기쁨이 있어야 텅 빈 시간을 채울 수 있는데 너희에게는 그런 게 없으니 더 넓은 세상을 찾으라는 말이, 들을 땐 아무렇지도 않던 말이 어느 날 부메랑처럼 날아오더니 점점 더 큰 소리를 내서 괴롭다고. 그 목소리가 들린 뒤로 나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생각만 들고, 전에는 몰랐는데 미래는 내가 갖고 싶다고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라 어느 순간 주어진다는 걸 알게 됐다고. 우식도 미래가 없는 건 마찬가지 아니겠냐고. 걔는 대학도 안 나왔으니 더 막막하다고. 임신을 한 것 같다고 하니까 행복하다고 했는데 임신이 뭔지 알고나 그러는 건지 모르겠다고. 아직 병원에 다녀온 건 아니지만 생리를 두 달이나 안 한 데다 레몬처럼 신맛이 당기는 걸 보면 거의 확실하다고. 오늘 아침엔 컷글라스를 몰래 꺼내 썼지만 어제는 반지를 훔쳤고, 그 반지가 주머니에 있는데 그걸로 뭘 할 수 있을까요? 묻고 싶었다.
“내 얘기가 좀 우울했나? 손님 온 것 같다.”
이른 시간이었는데 정말로 손님이 들어왔고 결국 수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우린 또 보자고. 채소는 깨끗하게 씻어서 머리부터 끝까지 다 먹어. 그게 좋아.” 백영해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 가게를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