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재경 이야기는 우식이 먼저 꺼냈다.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그렇듯 그 얘기도 공기처럼 가볍게 튀나왔고, 정확히 말하면 윤재경이 아니라 윤재경이 한 말에 관한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우식과 그런 심오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게 믿기지 않지만. 미세먼지 때문에 평년보다 기온이 훌쩍 높고, 뭉게구름 같은 하얀 안개가 호숫가를 신비롭게 감싸고 있어서 그랬을까. 텅 빈 시간. 되찾은 기쁨. 미래가 있는 삶. 같은 말들이 축축한 이슬비처럼 수진의 머리카락 사이로 파고들었다.
마감을 담당했던 윤재경이 가버리는 바람에 수진은 그날 연장 근무를 했다. 윤재경은 다음 날에도 출근을 하지 않았다. 소지품을 찾으러 오지도 않았다. 대신 일주일 뒤에 샌드위치 가게의 열악한 고용 환경과 소소하지만 빈번하게 행해진 사장의 언어폭력을 고발한다며 소송을 걸었다. 검은 서류 가방을 든 말끔한 차림의 변호사라는 사람이 가게를 드나들며 사장을 만난 걸 보면 완전 뻥은 아니었겠으나 사장에게 사과를 받는 일은 사과를 먹기보다 쉬워서 합의는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다신 못 볼 줄 알았던 윤재경이 찾아온 건 반지 사건이 있고 두 달이 지나서였다. 사장이 없는 시간대였고, 사장이 없다고 말하자 윤재경은 알고 있다고, 사장을 만나러 온 게 아니라 샌드위치를 먹으러 왔다며 토마토야채가득샌드위치를 주문했다. 영업시간이 끝나가고 있던 터라 내심 귀찮은 마음이었지만 수진은 토마토와 야채를 가득 넣고 샌드위치를 만들어 주었다.
“콜라는 서비스로 줄게.”
“고맙다.”
윤재경은 테이블에 앉지 않고 배식구 앞에 서서 샌드위치를 먹었다. 수진이 앉아서 편하게 먹으라고 해도 괜찮다며 굳이 그 앞에 선 채로 샌드위치를 베어 먹더니 두고 간 소지품을 찾을 수 있을지 물었다. 수진은 윤재경의 가방과 옷가지를 찾으러 사장의 골방(카운터 뒤에 있는 창고 같은 곳)에 들어가 먼지 쌓인 박스를 뒤진 끝에 겨우 가방 하나를 찾아 나왔다. 수진이 나왔을 때 홀에는 윤재경이 아닌 우식이 서 있었다.
“윤재경은?”
수진이 묻자 우식은 “윤재경이 왜?”하고 되물었다. 두 사람의 의문에 화답하듯 주방에서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났고 주방으로 가보니 윤재경이 다 먹은 샌드위치 그릇을 치우고 있었다.
“너 거기서 뭐해.”
수진은 황당하다는 투로 나오라고 말했고, 윤재경은 돕고 싶어서 그랬다며 빙그레 웃었다.
“됐으니까 나오기나 해.”
“그래, 나간다.”
윤재경은 우식을 보더니 “수진이 데리러 온 거야?” 하고 물으며, 너희 둘은 정말 잘 어울린다는 뜬금없는 소릴 했다. 우식은 좀 모자란 사람처럼 그러냐며 고맙다고 했고 윤재경은 정말 관심이 있어서 그런 건지, 이 상황이 어색해서 횡설수설하는 건지 모를 모호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너희가 몇 년 사귀었다고 했지? 수진이가 휴학하고 공장 식당에서 알바할 때 만났다고 했지? 근데 우식아, 너 공장은 왜 그만뒀니?”
그러더니 대뜸 ‘너희는 정말 좋은 애들이고 제대로 된 삶을 찾았으면 좋겠다.’고 말해서 수진과 우식을 황당하게 했다. 수진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제정신인가 싶어서였다. 나쁜 말은 아니었지만 그런 말을 친하지도 않은 윤재경에게 들으니 너무 이상하고 기괴하고 무섭기까지 했다.
“너희도 진짜 삶을 찾아야지.”
윤재경의 얼굴은 진지했고 딱히 무시하는 말투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노동이 어쩌고 미래가 어쩌고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은근히 짜증이 났다. 외부세계와 내부세계를 인식하고 주체성을 깨달아야 한다는 소리를 지껄일 때쯤 수진은 이미 딴생각을 하고 있었다. 집에 가서 잠이나 자고 싶다는 생각. 윤재경 나름대로는 의미가 있어서 떠들어 댄 것이었겠지만 수진은 윤재경이 말하는 진짜 삶이 뭔지, 인식이며 의식이며 하는 것들에 관심이 없었다. 게다가 윤재경의 말에서 흘러나온 정보들 -부모님이 모두 법조인이라서 법대에 간 것, 1년 만에 그만두고 철학으로 전공을 바꾸어 스트라스부르로 간 것, 그 길도 아닌 것 같아 2년 만에 귀국해서 이 일 저 일 하고 있다는 것- 을 알게 되자 이유도 없이 정이 더 떨어졌다. 그래서 수진은 주방으로 들어가 내일 아침에 해도 되는 일 -그릇 닦기-를 했고, 딱히 할 일이 없던 우식은 윤재경의 페이스에 말려들어 무방비하게 쏟아지는 언변에 노출되었다. 달콤한 것은 쓸모가 없다는 둥, 반짝이기만 하면 안 될 일이고 뾰족한 끝을 지녀야 한다는 둥, 열정적 자아가 눈을 뜰 수 있도록 환경을 바꾸어야 한다는 둥, 난해하기 짝이 없는 말을 한참 듣던 우식은 어렵게 끼어들 타이밍을 잡고, 이런 걸 물었다.
그러는 너는 왜 여기에서 일을 한 것이냐.
그때 윤재경이 뭐라고 대답했던가. 그게 우식과 수진이 나눈 대화의 핵심이었다. ‘텅 빈 시간을 못 견디겠어서’가 수진의 기억이었고, ‘빼앗긴 기쁨을 되찾기 위해서’가 우식의 기억이었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의 기억에 이렇다 할 확신은 없었다. 하지만 어렴풋이 뉘앙스만 남아 있는 윤재경의 대답은 그럴 이유가 전혀 없는데도 그들을 우울하게 만들었다. 오래된 불행들이 성큼 다가와서 애써 외면하고 있던 궁핍한 삶을 당혹스러울 정도로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왜? 이미 오래전에 삶의 일부로 받아들인 익숙한 불행이 새로이 태어나는 기분이 왜 들었을까. 궁색하고 구차한 생활이 곧 너의 삶이고 그게 너의 전부라는 것을 일깨우는 목소리가 왜 들리는지 수진은 알지 못했다. 너에게는 텅 빈 시간도, 되찾을 기쁨도 없으며 미래가 없으니 자유도 열망도 찾아올리가 없고, 늦은 봄 시들어가는 시금치처럼 누렇게 쪼그라들어 생기 없음이 억울한 일인지도 모른 채 사는 대로 사는 서글픈 사람이 될 거라는 예언을 귓가에 속삭이는 정체가 무엇인지 수진은 정말이지 몰랐다.
우식은 수진의 해석이 과하다고 말하면서도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였고 그들 사이에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사장이 여친하고 헤어진 게 반지 때문은 아니었지?”
우식이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했지만 수진은 반지 따위는 궁금하지도 않았고 그건 우식도 마찬가지라서 그 얘긴 암울하게 막을 내렸다. 바로 그 반지가 지금 수진의 주머니에 있는 것이다. 그것도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뇌의 지배자가 되어 수진의 모든 생각을 ‘그래서 반지를 어떻게 할 거냐’는 의문으로 귀결시키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