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진
오전 일곱 시. 은색 스테인리스 식기세척기를 열고 유리잔과 머그잔, 타원볼과 접시를 비롯한 커트러리를 꺼낸다. 수진은 마른 린넨 수건으로 아직 온기가 느껴지는 식기들을 다시 한번 싹싹 닦는다. 두 손으로 정성 들여 닦아야 남아 있던 얼룩이 완전히 제거되면서 새것과 같은 상태에 가까워진다고 사장은 말했다. 정말 새것이 될 순 없지만 그런 느낌을 내는 건 가능하다고. 누군가 썼던 식기를 재사용하는 것이므로 세심한 손길로 청결한 상태로 돌려놓는 것이 직업윤리라는 말도 했다.
“쉬워. 컵을 닦을 때 말이지, 그 일이 전부인 것처럼 하면 돼.”
사장은 사장이니까 그렇다 치고 수진은 알바로서 컵을 그렇게까지 닦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왔다. 일회용품이 아니고서야 늘 새 식기를 사용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샌드위치 하나 먹으면서 식기의 청결 상태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손님도 없을 테니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릇 정리를 할 때면 사장의 목소리가 은근한 힘을 발휘하면서 마치 이 일이 전부인 것처럼 열중하게 되는 것이었다. 마른 수건으로 컵의 표면을 밀고 비비는 반복적인 노동이 마음을 진정시키는 효과가 있는 걸까.
반지를 어떻게 해야 하나.
수진은 그릇을 닦는 내내 반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반지를 발견하자마자 주머니에 집어넣던 민첨함은 온데간데없고 희미한 양심만이 유령처럼 수진의 곁을 배회하고 있었다.
‘물건을 훔치는 건 명백하게 나쁜 짓이고… 감옥에 갈 수도 있고… 평생 죄책감에···.’
수진은 자신이 매우 착하고 도덕적이고 헌신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현실 속 자신의 위치를 겸허하게 받아들이며 분수를 알고 행동한다고. 지각은 절대 하지 않고, 일찍 출근해서 약간 늦게 퇴근하는 걸 당연히 여기며 매사에 자신이 손해를 보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습관도 그런 태도에서 기인한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반지는.
반지는 주방의 가장 오른쪽 찬장의 맨 위 칸, 안 쓰는 그릇을 놓아두는 자리에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사장이 다도에 흥미를 잃고 그 쓰임이 점차 줄어들다가 아예 사라진 분청상감 다도 세트의 다관 안에 들어 있었다. 도대체 반지가 왜 그 안에 들어가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어제저녁 느닷없이 시작된 대청소만 아니었어도 반지는 아직 그 자리에 있을 것이었다. 언젠가는 발견되겠지만 당분간은 아닐 것이고 그걸 발견하는 사람이 수진도 아닐 터였다. 수진은 곧 일을 그만둘 예정이었으니까. 다음 달… 혹은 다음다음 달에. 우식과 헤어져도 그만둬야 했고, 혹시 그렇지 않더라도 일을 계속할 순 없었다. 결국 ‘일’은 터졌고 현재로서는 아무 증상도 없지만 몸은 원래 안 보이는 곳에서 더 격렬한 변화를 일으키는 법이었다.
어쨌든 사장이 잃어버린 1캐럿짜리 다이아몬드 반지는 지금 수진의 주머니에 들어 있다. 명동 신세계에서 이천 만원이나 주고 산, 클레리티 등급이 우수한 레디언트컷 반지가 없어졌다고 펄펄 뛰면서 알바생을 추궁했던 게 벌써 2년 전의 일이다. 사장에게는 그 사건이 역대 최악의 사건으로 남아 있겠지만 수진에게는 그렇게까지 유별나게 기억되지 않았다. 가게에서는 크고 작은 일들이 늘 일어났고 다른 기억에 남는 일-이를테면 손님이 데리고 온 검은색 리트리버를 보고 (보기만 했는데도) 까무러친 손님 때문에 구급차를 부른 사건이나 공장 식당에서 가스 배관에 이상이 생겼다며 갑자기 샌드위치 50개를 주문하는 바람에 두 시간 동안 미친 듯이 만들고 포장하고 배달까지 성공한 기적 같은 일-이 더 기억에 남았다.
그렇다고 반지 사건이 수진에게 아무것도 아닌 건 아니었는데 사건 자체보다는 윤재경이 한 말 때문인 것 같았다. 윤재경은 사장으로부터 의심과 추궁을 받고 기분이 몹시 상해서, ‘사람을 뭐로 보느냐’며 불같이 화를 내고 앞치마도 벗지 않고 가게를 나가버린 마감조 알바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