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드위치와 손님들
염색하지 않은 긴 백발을 아래로 묶고 보라색 카디건에 검정 치마를 입은 노인. 앤은 가장 안쪽 테이블에 앉아 수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침마다 오는 단골손님. 샌드위치 빵으로 스프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닦아 먹고 깨끗한 스프볼과 접시만을 남기고 가는 앤. 진짜 이름은 따로 있겠지만 수진은 그에게 앤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오늘은 신선한 로메인을 넣어줄 수 있으니 야채가득 샌드위치를 추천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앤의 테이블로 걸어가는데 문밖에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말? 정말이야?”
“아라 진짜 대단하지?”
“알라, 아라 제법인데. 귀도 좋고 머리도 좋고 손재주까지 좋다고.”
손님이 오기엔 아직 이른 시간이었는데 문이 벌컥 열리더니 정장 차림의 여자 두 명과 캐주얼한 복장을 한 남자가 들어왔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 두 여자와 달리 입을 툭 내밀고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남자는 마지못해 따라 온 것처럼 보였다.
“가게 귀엽다.”
여자 중 한 명이 선글라스를 벗고 가게를 둘러보았다. 다른 여자는 벌써 자리를 잡고 앉아 테이블에 놓여 있는 메뉴판을 펼쳤고, 남자는 죽상을 한 채로 선글라스를 든 여자 옆에 서 있었다. 여자들이 화려하게 차려입은 편이었다면 남자는 평범한 차림이었는데 이목구비의 균형이 좋고 턱 선도 날렵해서 한눈에도 미남이라는 사실을, 본인도 본인의 잘생김을 알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세 사람 모두 수진이 사는 호숫가 공장 동네에서는 보기 어려운 타입이었다.
“이 동네 점점 마음에 든다?”
여자는 가게 안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수진은 그제야 아직 바깥에 달린 돌출 간판의 조명도 켜지 않았고, 음악도 틀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불을 켜기도 전에 손님이 두 팀이나 오다니. 아직 영업을 시작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기엔 이미 앤이 앉아 있었다.
“뭐가 맛있나요?”
여자가 자리를 잡고 앉아 메뉴를 살피면서 물었다. 통이 넓은 핀턱 팬츠에 가슴골이 훤히 보이는 갈색 브이넥 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그 차림이 아주 근사했다. 수진은 오랜만에 멋을 낸 사람을 보니 왠지 기분이 좋았고, 오늘은 신선한 야채가 있으니 야채가 들어간 샌드위치가 맛이 좋을 거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선글라스 여자가 좀 더 빨랐다.
“지영아, 그냥 맨 위에 있는 세 개 시켜.”
“맨 위에? 거기 뭐가 있는데? 여기 술도 파나요?”
지영이라는 이름의 여자가 수진을 보며 물었다.
“병맥주는 있어요.”
“와인이나 칵테일 같은 건 없는 거죠?”
지영이라는 여자가 와인과 칵테일을 물어보자 선글라스 여자는 메뉴판을 탁 소리 나게 뒤집어버렸다.
“지영아 맥주든 칵테일이든 좀 참아. 참을 수 있잖아. 있다가 끝나고 마셔. 실컷 마셔. 저희 그냥 이거, 스페셜 비니거 야채 샌드위치? 이거 세 개랑 주스 세 잔 주세요. 하나는 오이 빼야 되는데, 뺄 수 있나요?”
“네. 알겠습니다.”
수진이 돌아서는데 그때까지 가만히 있던 남자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다른 메뉴가 먹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자 선글라스 여자는 손바닥을 쫙 펼쳐 남자의 이마를 살짝 밀면서 “아라야 너는 그냥 주는 대로 먹어.” 라고 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떠나는 수진을 불러 세워 메뉴를 바꾸겠노라고 했다. 그들은 종류가 다른 세 개의 샌드위치를 주문했다.
수진은 주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카운터로 가서 시디플레이어를 작동시켰다. 한동안 빈티지 소품에 빠져 있던 사장이 사다 나른 물건 중에 그나마 쓸 만한 것이었다. 플레이 버튼을 누르자 마이클 잭슨의 <You Rock My World>의 반주가 흘러나왔다. 언제 적 마이클 잭슨이야···. 당황한 수진이 다급하게 임윤찬이나 조성진 시디를 찾아 손을 뻗는데 홀에서 활기찬 대화가 들려 왔다.
“오! 마이클 잭슨!”
“얜 마이클 잭슨이 백인 되려고 성형했다는 루머를 아직도 믿잖아.”
“아니거든.”
“이 노래 알아? 마이클 잭슨이 죽기 직전에 낸 앨범인데.”
“알 리가 있나.”
“죽기 직전은 아닐걸.”
수진은 세 남녀가 무슨 사이일까 곰곰이 생각하다가 그런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단호박스프를 데우고 계란을 삶았다. 반지에 대해서도 더는 생각하지 않았고 텅 빈 시간이라느니 기쁨을 되찾아야 한다느니 미래가 없다느니 하는 말도, 죄책감이니 수치심이니 하는 감정도 쓸어버렸다. 고매하게 앉아 생각이나 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당장 해야 할 일의 순서를 매겨야 했다. 아니 그냥 몸을 움직여야 했다.
수진은 샌드위치 만드는 일이 좋았다. 조리대에 왁스 페이퍼를 깔고 빵 위에 소스를 골고루 펴 바르는 것부터 좋았다. 아니 소스를 만들기 위해 피클을 잘게 써는 일부터 좋았다. 손님들은 샌드위치 소스에 몇 가지 양념이 들어가는지 모를 것이다. 레몬즙, 머스타드, 설탕, 후추, 잣, 피클, 파슬리, 마요네즈. 그 외에도 샌드위치의 종류에 따라 갈릭 후레이크가 들어갈 때도 있고 통마늘을 갈기도 했다. 바질 샌드위치에는 홀스래디쉬와 그라나 파마노를 넣은 소스가 잘 어울렸고 잠봉뵈르에는 가염 버터를 넣었다. 빵의 배를 가르고 소스를 발라 그 위에 치즈를 깔고, 삶은 계란을 동그랗게 썰어서 여섯 개씩 올리는 일, 그 위에 토마토나 양파나 오이를, 메뉴에 따라서는 가지나 베이컨을 놓는 것도 좋았고 적채를 감싼 양상추를 올리고 탑처럼 높아진 속을 뚜껑 덮듯이 꾹 누르는 것도 좋았다. 샌드위치를 선물처럼 포장하는 것도, 그걸 반으로 썰었을 때 나오는 데칼코마니 같은 형상을 보는 것도 좋았다.
메뉴의 종류가 제각각이라서 평소보다 속도가 더디긴 했지만 수진은 네 개의 샌드위치를 능숙하게 만들었다. 플레이팅을 끝내고 두 개의 접시를 들고 나갔을 땐 손님이 한 명이 더 와 있었다. 아침부터 손님이 줄줄이 들어오는 이상한 날이었다. 점심시간에도 좀처럼 없는 일인데. 게다가 오늘은 휴일이고 휴일에 이 동네를 찾는 사람들은 대체로 나이 든 연인으로 커피나 차를 마셨다. 그들이 부부가 아니라는 건 대충 다 알았고 호숫가 공장 동네에서 그런 걸 일일이 신경 쓰고 의식하는 사람도 없었다.
새로 온 손님은 남자였고 외국인이었다. 파란 니트에 청바지를 입은 남자는 몸집이 매우 작아서 중학생처럼 보였다. 피부는 어두운 편이었고 머리카락은 까맣고 짧고 곱슬거렸다. 수진은 그를 신기한 듯이 쳐다보았다. 그가 외국인이라서가 아니라 어깨에 메고 있는 엄청 큰 사이즈의 반려동물 이동가방에서 희한한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남자는 조금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마음을 정한 듯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 자리는 가게에 있는 유일한 단체석이라서 수진은 자리를 옮길 것을 부탁할지 말지 고민스러웠지만 아직 이른 시간이었고 사장도 없는 마당에 빡빡하게 굴지 않기로 했다.
수진이 두 테이블에 차례로 서빙을 끝냈을 때 남자가 손을 들어 주문하겠다는 의사를 전해왔다. 남자는 조용한 목소리로 바게트 샌드위치와 탄산수를 주문하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잠깐 내놔도 될까요?”
“뭐··· 뭘요?”
“둥둥이요.”
남자는 자신이 들고 온 가방을 두 팔로 감싸면서, 둥둥이가 안에 있는 걸 너무 답답해한다고, 얌전한 아이라서 괜찮다고 말했다. 수진은 이런 적이 처음이라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는데 남자의 눈빛이 너무 간절해서 알겠노라고 대답하고 말았다. 남자가 가방에 달린 두툼한 지퍼를 내리자 기다란 회색 꼬리를 가진 다람쥐인지 족제비인지 모를 생명체가 고개를 쏙 내밀었다. 둥둥이는 콩콩콩 걸어 나오더니 정말 어디로 도망가지 않고 얌전하게 남자의 옆에 앉아 있었다.
“어머! 쟤 뭐야! 진짜 귀엽다. 얘들아, 저기 좀 봐. 고양이야!”
선글라스 여자는 다람쥐를 보고 고양이라고 하면서 신난 얼굴로 남자의 테이블로 왔다. 수진은 염려스러웠지만 다행히 남자는 괜찮은 것 같았고, 미소 띤 얼굴로 대화도 주고받았다.
“회색큰다람쥐예요. 이름은 둥둥이고요.”
“꼬리가 빗자루처럼 기네요.”
여자는 둥둥아, 둥둥아, 하며 다람쥐의 등을 쓰다듬으며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었고, 나머지 일행은 음식을 먹었다.
수진은 주방으로 돌아와 남자가 주문한 샌드위치를 가져다주고 나서야 겨우 한숨 돌렸다. 다행히 손님이 더 오지는 않았고 대신 우식에게 문자가 왔다.
-끝나고 미술관 안 갈래?
수진은 미술관은 너무 멀지 않냐고 답장을 보냈다.
-그 앞에 잔디 광장에서 공연을 한대.
-공연?
-가수도 온대.
수진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쉬고 나니 오랫동안 한숨을 참아 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 자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지금 우리가 공연이나 볼 때가 아니라는 것을 우식도 알아야 했지만 그걸 누가 알려준단 말인가. 수진은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고 싶었다. 그러나 짧은 시간에 다양한 메뉴를 만드느라 어수선하게 늘어놓은 재료들을 치워야 했다. 평소에 잘 쓰지 않는 비니거와 앤초비까지 모조리 꺼내놓은 탓에 조리대가 엉망이었다. 수진은 억지로 몸을 일으켜 올리브 병을 겨드랑이에 끼우고 치즈를 집어 들었다. 그러다가 앞에 있던 피클 병을 툭 치는 바람에 병이 바닥으로 떨어져버렸다. 병은 예외 없이 와장창 깨졌고 짠 냄새가 진동했다. 수진의 입에서 저절로 한탄이 나왔다.
그냥 눈이나 감고 앉아 있을걸.
수진이 맨손으로 깨진 유리 조각을 대충 모으고 있을 때 지영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가 주방으로 고개를 쑥 내밀었다.
“괜찮아요? 뭐가 깨졌죠?”
수진이 가만히 앉아 있자 여자는 더 큰 소리로 말했다.
“거기 손에 피가 나네요. 손 다치셨어요. 피 나요, 피!”
여자의 말을 듣고 보니 손등에 가느다란 생채기가 나 있고 동글동글 피가 맺혀 있었다.
“알아요. ”
수진은 현기증이 났지만 여자가 더 이상 호들갑을 떨지 않도록 구급상자를 들어 보였다. 손등에 난 피를 물로 씻고 밴드 여러 개를 교차해서 붙여 핏자국이 보이지 않도록 했다. 여전히 어지럼증이 가시지 않아서 눈을 감았는데 눈앞이 깜깜하니까 머리가 더 빙빙 도는 것 같아 도로 눈을 떴다. 다행히 여자는 자리로 돌아간 것 같았다. 아침부터 손님이 너무 많이 왔어.
“언니, 사장님이 손을 다치셨다. 그 위험한 것이 여기까지 따라왔나 봐.”
밖에서 여자의 명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명랑한 목소리와는 대조적으로 그 내용은 어딘지 좀 섬뜩한 구석이 있었는데 아마도 살이니 부적이니 하는 단어들 때문인 것 같았다.
“지영아. 점 좀 그만 보고 다녀.”
“점 아니고 타로 봤어. 그치, 아라야?”
“타로 아니고 신타로.”
“그게 그거잖아.”
“지영아.”
지영이라는 여자는 선글라스 여자의 다음 말을 가로채 자신이 요리하다가 다친 일화를 이야기했다. 아이를 위해서 요리할 땐 한 번도 다친 적이 없는데 아이가 그렇게 되고 난 뒤로 이상하게 자꾸 다친다고. 칼에 베이는 게 아니라 냄비 뚜껑이나 샐러드 집게 같은 전혀 위험하지 않은 것이 자기를 공격한다고.
“그래서 이제부터 부엌 출입을 아예 안 하기로 했어. 악기를 그만둘 순 없잖아.” 일행은 대답이 없었다. 그래도 왠지 다정한 얼굴로 여자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는데 그 이유는 여자의 말투에 활기가 넘쳤기 때문이다.
그들의 관계를 내키는 대로 상상하면서 이야기를 엿듣던 수진은 미묘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지금이라도 싹 다 뒤집어야 한다는 생각, 다른 누구의 손이 아닌 자신의 손으로 길을 터야 한다는 생각이 맹렬하게 타올랐다. 외부 세계를 바꿀 수 없다면 내부 세계부터 부수고 볼 일이었다. 기쁨이든 열망이든 없으면 없는 대로 살겠지만 서글픈 시금치는 되지 않겠다는 예상치 못한 다짐이 날카롭게 정수리를 때렸다. 하지만 밀려드는 온갖 감정에 젖어 들 여유도 없이 수진은 고무장갑을 끼고 접시 조각을 치워야 했다. 시계를 보니 9시 40분이었다. 아직 열 시도 되지 않았다니. 변덕스럽게도 절망스러운 기분이 되었다가 백영해가 가져온 야채를 다 다듬지도 못했는데 곧 점심시간이 될 거라는 생각에 마음이 바빠졌다. 그렇게 생각기가 무섭게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너덧 명은 되어 보이는 발소리. 설마. 환청이겠지. 수진은 기진맥진한 채로 그들을 돌려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럴 수 없음을 잘 알았고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바로 그때, 계단의 디딤판에 있는 거뭇한 자국이 눈에 띄었다. 백영해가 담뱃불을 끄면서 재미 삼아 만든 동그라미 모양인 듯했다. 수진의 눈에 동그란 도넛처럼 보이던 담배빵은 곧 반지 모양으로 바뀌었고 수진은 흠칫 놀라면서도 주머니에 있는 반지를 꺼내어 손바닥 위에 올렸다.
조그맣고 반짝이는 이 작은 물건이···. 수진은 다각도로 굴절되어 뿜어져 나가는 무지갯빛 섬광을 가만히 손안에 가두었다가 손가락을 쫙 펴서 반지를 끼웠다. 약지에서는 헐렁하게 돌았지만 가운데 손가락에는 딱 맞았다.
그림_김혜진
소문난 빵순이. 빵에 대한 이야기를 쓰거나 그릴 때 뉴런이 그 어느때보다 활발하게 움직이는 것을 느낀다. 읽고 쓰고 그리는 일을 사랑한다. 인스타그램에 그림을 올리는데 가장 반응이 좋은 것은 일상툰. 모르는 사람이 눌러준 ’좋아요‘에 심박수가 올라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