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롱 깊숙이 어딘가 방치되어 있는 간호사 면허증, 남편의 아내, 아이들의 엄마 그때까지는 이게 나의 본캐였고, 육아에 전념하느라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원하는지 조차 몰랐다. 간호사로서는 신규 간호사 8개월 경력 밖에 없는 내게 간호학과를 졸업하고 왜 전공을 살리지 않느냐, 후회하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나의 경력은 포기했지만 가정과 아이들에게 최선을 다 했기에 후회는 없다.”라고 답한다. 사실 경력도 없는 내게 강사라는 좋은 제안이 오기도 했고, 재취업 생각을 안 한 것은 아니지만 어디에도 도움 받을 곳이 없던 연연년생 삼 남매 엄마는 어린아이들을 두고 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자연스럽게 육아하는 전업 맘이 되었다.
하루하루 성장하는 아이들을 보면 흐뭇하고 평범한 일상에 감사한 마음이지만, 아이들이 커가는 만큼 헛헛한 마음이 드는 건 왜 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나’ 스스로에게 '왜?'냐고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답하던 시기였기에 남편의 갑작스러운 전화 한 통은 나에게 큰 울림이었다. 잔잔해 보이지만 꿀렁이는 호수 바닥에 돌멩이를 던진 격이다.
"여보 매물 나가기 전에 빨리 가서 일단 보고 와."
남편은 회사에 있기 때문에 매물 보는 일은 온전히 나의 일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내가 계약서에 도장을 찍을 줄은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상상조차 못 했다.
송파구에 위치한 스터디 카페.
주변을 둘러보니 스터디 카페만 6개. 볼 것도 없었다. ‘후, 장난하나?’ 그래도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한 번 보고나 가자' 입구에 들어서니 기분 좋은 냄새와 함께 인상 좋으신 사장님이 반겨주셨다.
"제가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데 식당이 잘 되어서, 스카(스터디카페) 관리하기가 힘들었고, 응대를 잘 못해서 지금은 회원들이 많이는 없어요. 그래도 이것저것 다시 이벤트 하고 하면 살릴 수 있을 거예요. 나도 빨리 정리하려고 인테리어며, 물품들 다 손해 보고 거저 넘기는 거예요."
“그래도 적자는 아니에요”
거짓말하실 분은 아닌 것 같았다. 그렇게 믿고 싶었던 건지도.
천천히 내부를 살펴보았다. 공부하는 손님은 딱 한 분 있었지만 깔끔하고, 느낌이 좋았다.
'내가 이 공간의 사장님이 되면 어떨까?'라는 불씨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순간 갑자기 심장이 마구 뛰고 머리가 뜨거워짐을 느꼈다.
‘음.. 깔끔하긴 하네, 조금만 손보면 괜찮을 것 같기도 한데..?’
‘잘만 하면.. 내가 살릴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천만 원이면 인생 공부했다 칠 수도 있지..’
‘아냐, 미쳤어? 이걸 내가 어떻게 해.”
'했다가 망하면? 피 같은 내 돈 천만 원만 날리는 거 아냐?'
'근데 이렇게 손님이 없는데, 이걸 어떻게 다시 살려?'
'사람 상대 안 해본 지 13년째인데, 손님을 어떻게 응대하지? 난 사람이 제일 무서운데..'
'소심한 내가 사장이 될 수 있을까?'
‘요즘 애들 무섭다던데.. 학생들 관리를 어떻게 하지?’
설렘과 두려움 어느 쪽도 선을 넘지 않으려 팽팽하게 맞서고 있을 때, 벨 소리가 울렸다.
"여보 봤어? 어땠어?"
"응. 나쁘진 않더라.. 깔끔하고, 근데 주변에 스카가 너무 많아. 바로 옆부터 시작해서 길 건너면 스카만 6개야. 경쟁사들이 득실득실해"
"오 그래? 깔끔하고 나쁘지 않으면 계약하자. 한 번 경험 삼아해 보자”
아니 뭐 계약이 장난인가?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나. 자기는 회사 다니면서 뭘 같이 해봐? 운영하게 되면 내 명의로 계약해야 하고, 내가 다 책임져야 하는데! 애들 키우면서 스카는 어떻게 관리하고, 심지어 망한 스카를 어떻게 살리라는 거야?? 말도 안 돼. 아니 나 못 해.
벚꽃이 눈처럼 흩날리던 그 4월,
나는 모든 두려움을 안고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그 순간, 내 삶의 새로운 장이 열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둠 속에서 길을 찾아 나서는 것처럼, 불확실한 미래가 두렵기도 했지만, 동시에 내 제2의 인생이 펼쳐질 것 만 같은.
어떤 도전이 기다리고 있을지, 그 속에서 내가 어떻게 변화할지를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