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야기는 <나의 대학원생 이야기>에 실렸던 이 글을 조금 더 풀어서 썼습니다. 코로나19가 처음 유행했던 2020년 2월의 일이기 때문에, 지금(2022년 5월)의 모습과는 다르다는 걸 이해해주세요.
입원 후 첫 주말이 지나니, 그제서 입원 생활에 익숙해졌다. 내 마음대로 문 밖으로 나갈 수 없었고, 샤워 호스가 없어서 몸을 씻는 게 많이 힘들긴 했지만, 그래도 죽지 않고 살아있음에 감사했다. 저녁 아홉 시마다 각자의 자리에서 기도했고, 확진자 단톡방에서는 하나둘 씩 퇴원하는 사람들도 나오기 시작했다.
내 안에 있는 혼란함이 정리되어야지만 다른 사람도 보이는 게 아닌가? 이번 글에서는 입원 기간 보름 동안 있었던 몇 가지 에피소드들을 옴니버스식으로 정리해보았다.
코로나19로 입원을 하게 되니 여러 사람들한테 전화를 주고받았다. 같은 소그룹 리더 누나, 외가 친척들, <대학원생 이야기>에서 많이 얘기했던 지도교수님, 대학원 행정실, 입원 전날 만났던 친구, 15년 지기 단짝 등 많은 사람들로부터 연락이 왔었다. 각자의 목적 때문에 연락이 와서 감사했고, 그 덕에 가장 힘들었던 입원 후 3일을 견딜 수 있지 않았나 싶었다. 인맥 없다 자책했던 내가 사람들 덕에 살아나는 경험을 해서 정말 놀랐다.
나의 병실 룸메이트는 70대 어르신 두 분이었다. A 선생님은 매우 조용하신 분이었지만, B 선생님은 직업 특성상 성격이 화끈하셨다. A 선생님은 병실 탁자를 펴 놓고 책을 읽고 계셨지만, B 선생님은 병실에 처음 들어올 때부터 뉴스 속보를 하루 종일 틀어놓으셨다. 처음에는 코로나19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니까 뉴스를 계속 틀어놓으시겠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주무시는 시간 빼고 TV를 계속 틀어놓고, 가끔 나에게도 동조해달라는 투로 얘기를 하시니, B 선생님에 대한 이해심이 점차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2년 전 그 당시에는 코로나19 환자를 거의 죄악시하는 분위기여서 코로나19 소식을 듣고 싶지 않았는데, 옆에서 계속 뉴스속보를 트니까 짜증 나지 않았을까? 나에게 돌아가는 욕을 굳이 찾아 듣고 싶지 않은데, 그분께서는 그게 아니었는가 보다. 고령의 나이 때문인지, 화를 찾아 받으신 건지 모르겠지만, B 선생님은 입원 12일 차에 다른 병원으로 옮겨가셨다. 화는 나누면 반이 되는 게 아니라 두 배가 되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입원할 때에는 평일마다 하루 한 번 회진을 하게 된다. 근데, 격리 병실에서의 회진은 일반적인 경우와 달리 전화로 진행된다. 5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얘기를 해 주는데, 너무 간단한 얘기만 들을 수 있어서 조금 아쉬웠다. 처음 만나는 병이라서 그런가 보다 이해하기는 했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전화하는 건데 조금만 더 상세히 설명해주면 어땠을까 싶었다.
입원 5일 차부터 퇴원 여부가 결정되는 PCR 검사를 받게 되었다. 나 때만 하더라도 이틀 동안 받는 PCR에서 음성이 나와야 퇴원을 했기 때문에, PCR 결과가 음성이 뜨길 간절히 기도했었다. (코로나19 잔여 바이러스가 전파력이 약하다는 걸 알게 된 건 퇴원 후 몇 달이 지나서였다.)
PCR에 익숙해질 때쯤에 자그마한 사건이 일어났다. 여느 때와 같이 코와 입에서 검체를 채취했는데, 검체 채취봉이 바닥으로 떨어져 버렸다. 나도 당황하고, 검체를 채취한 간호사도 당황했다. 병실에서 간호사실로 연락한 후에 조치를 취하긴 했지만, 채취봉을 다시 오기까지 기다렸던 10분은 10년 같이 길었다.
입원하는 보름 동안 수많은 일들을 더 겪었지만, 더 많은 이야기들은 가슴에 담아두었다. 좋은 건 나누면 두 배가 되지만, 아쉬운 걸 나누면 나만 상처받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