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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비빔면

한 그릇의 이야기 - 4

by 빛새
모두가 예라고 할 때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20년 전에 화두가 되었던 한 CF 슬로건은 지금도 간간히 이야기된다.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가는 창의력, 세상의 압력에 굴하지 않는 도전정신은 어느 분야에서든 꼭 필요하다. 오늘은 밥상에서 실험정신을 발휘했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준비했다.


날이 더워질 때면 라면 매대에는 즉석 냉면으로 가득 찬다. 라면 시식 코너에선 차갑고 새콤달콤한 면을 먹으며 무더운 여름을 이겨내라고 말하지만, 차가운 면을 싫어하는 나에게는 그 이야기가 잘 들어오지 않았다. '자고로 면은 뜨거워야 제맛인데, 왜 사람들은 여름이 되면 냉면을 먹을까?'라고 생각했기에, 냉면을 뜨겁게 먹고 싶다는 도전 정신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물냉면을 뜨겁게 끓여 먹을까 생각했지만, 그걸 끓여봐야 잔치국수가 될 거 같아서 비빔냉면을 볶아 먹었다. 고이 담겨 있는 비빔면을 뜨겁게 볶아 한입 먹어보니 맛있었다. 뜨겁게 달궈진 매콤한 소스에 후추와 참기름으로 볶아 먹었는데 나쁘지 않았다. (안 먹어본 사람들을 위해 맛 표현을 하자면, 뜨거운 비빔면은 아주아주 순하고 새콤달콤한 불닭볶음면 같은 맛이 난다.)


목욕탕에서 부력을 발견한 아르키메데스가 그 자리에서 왕에게 달려갔던 것처럼, 뜨거운 비빔면에 감동한 나는 내 동생에게 새로운 맛의 경지를 알려주고 싶었다. 며칠 후 난 동생과 함께 집에서 점심을 먹게 되었고, 뜨거운 비빔면을 한 그릇 끓여서 대접해 주었다. 처음에는 맛있게 먹어서 동생도 만족하는 줄 알았지만, 한 그릇을 다 비우고 나서 '앞으로 비빔면은 차갑게 끓여 달라.'는 냉랭한 피드백을 받았다. 아, 난 개척자가 아니라 매드 사이언티스트였구나.


뜨거운 비빔면, 누군가에겐 위대한 한 발짝이지만, 다른 이에게는 그저 불쾌한 실패로 치부된다. 내가 정말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이 남에게는 혐오스러운 것이 될 수 있단 걸 몰랐기에, 동생의 차가운 반응에 크나큰 실망감을 받았던 게 아닐까. 취향은 존중받아야 하지만, 그 취향을 강권하면 못 쓴다는 걸 배웠다.


혁신과 역함은 한 끝 차이.


네 번째 그릇 - 뜨거운 비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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