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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희주 Aug 05. 2022

어머! 저건 사야해!

다르게 생겨먹은 모녀의 세상 모든 일 각자 리뷰 : 충동구매

엄마 (68년생)

/ 인생은 B(buy)와 D(deposit) 사이의 C(choice)


“사모님, 저희가 아주 좋은 껀이 있어서 추천해드리려고 전화드린…”


그날 나는,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이 말을 끝까지 들었어야 했나 보다. 그 당시엔 집전화로 툭하면 기획 부동산 전화가 걸려왔는데, 주로 사기 전화가 많았다. 당연히 나는 방어적으로 될 수밖에.


“저기요, 관심 없으니 전화 끊을게요.”


단호하고 차갑게 전화를 끊으려고 한 순간, 생각지 못한 반응이 훅 들어왔다.


"관심 없는 거 좋아하네, 사실은 돈이 없으면서. 뚜뚜- 뚜뚜-”


상대방은 그날 컨디션이 상당히 저조했나 보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리도 재빠르고 정확하게 자신의 분노를 표출하고, ‘내가 건 전화는 내가 끊는다’는 원칙을 관철시킬 수가.

예상 못한 반격에 한동안 멍해있던 나는, 그날 이후 한 가지 원칙을 세우게 된다. 뭔가를 살까 말까 고민될 땐 나에게 묻는 거다.

내가 망설이는 건, 관심의 크기 때문인가 아니면 돈의 크기 때문인가.


관심은 크지만 돈 걱정 때문일 때는 다시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돈이 들어도 살만한 가치가 있을 수 있으니까. 위험한 건 돈은 별로 문제 되지 않지만 관심이 적은 물건이다. 비싸면 포기가 쉬운데, 싸니까 충동구매 위험이 높아지는 거다. 최대치의 관심은 오직 쇼핑의 순간뿐, 사놓고 처박아 두기 쉽다.

가장 즐거운 건 당연히, 돈은 혜자스럽고 관심은 높은 물건일 때. 충동구매일지라도 후회로 남을 우려가 적다. 나의 충동구매 품목 중에 하나인, ‘할매패션’ 쇼핑이 그렇다.


10년 전쯤이던가. 광장시장을 구경하고 나올 때였다. 알록달록 강렬한 원색을 자랑하는 할매 패션 옷가게를 지나는데  ‘삼천원’이란 글자가 눈에 확 들어왔다. 그때가 초가을쯤이었는데 후들후들 부드럽고 가벼운 7부 몸빼 바지가 꼴랑 ‘삼천원’이라니. 더군다나 굵고 짧은 할매패션 사이즈는 20세기형 바디핏을 지닌 나에게 딱이었다. 결국 나는 원색 옷 틈에서 검은 바탕에 흰 물방울무늬가 작게 찍힌 할매 바지 하나를 사서, 본전을 10배 정도 활용한 다음 굿바이 했다. 그때부터 전통시장에 가면 할매패션 옷가게를 꼭 한 번씩 뒤진다. 계획 같은 건 없다. 원칙은 ‘감 김에’이다. 간 김에 충동구매.

집에서 입는 옷이니 ‘누가 본다고’ 라며 배포 크게 생각한다. 남편이나 딸의 시선 따위는 가볍게 패-스.


이번 휴가에도   건졌다. 여수 순천 지역을 돌았는데, 여수에 갔을  집에서 입을 시원한  반바지를 샀다.  


할매 패션이라고 해서, 강렬한 모란이나 장미 같은 꽃무늬만 등장하는 건 아니다. 이렇게 귀여운 스마일도 있다. 보라색이나 자주빛깔 옷만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 역시 선입견. 찬찬히 보면 가벼운 색감도 있어 뒤지는 재미가 쏠쏠하다. 가격은 예전처럼 경악스러우리만치 싸진 않기도 하다. 이것도 무려 만원이다. 물건을 팔던 사장님 말씀에 따르면 ‘레이온’이라 비싸다고 한다. 그냥 면 반바지는 오천원 짜리도 있으니 함 보라고 권하셨지만, 호기롭게 레이온을 집어 들었다.


할매 패션의 가장 중요한 특장점은 두 가지로 집약된다.

첫째. 여름엔 시원하게, 겨울엔 따숩게.

둘째. 무조건 가볍게.

면과 레이온 반바지 중에서, 대원칙에 모두 해당되는 건 후자였다.


여행을 마치고 집에 와서 짐을 푸니 후회가 밀려온다. 충동구매 때문이 아니다. 반대로 더 충동하지 못한 걸 후회한다. 사는 김에 딸한테 줄 것도 하나 살 걸. 마리메꼬 디자인스러운 꽃무늬와 색상의 반바지도 하나 있었는데.


흔히 충동구매하면 좋지 않은 거라고 한다. 대체로 동의하면서도 문득 궁금하다.

물건을 살 때 충동적으로 사지 않는 물건의 비율이 과연 얼마나 될까? 우연과 충동으로 산  물건이 주는 즐거움도 쏠쏠하지 않나?


계획과 충동 사이.

물건을 살 때도, 인생을 살 때도, 계획과 충동 사이의 진자 운동은 계속된다.

계획대로 살다 보면 충동의 에너지가 그립고, 충동에 휩싸여 지내다 보면 계획의 결과물이 부럽고.


날도 더운데, 레이온 반바지 떨쳐 입고 여행 때문에 중단된 일들이나 슬슬 계획해야겠다.




딸 (97년생)

/ 아무도 나를 모르고 돈이 많았으면 좋겠어요


내 소비는 거짓말 탐지기 그래프와 비슷하다. 대체로는 폭이 좁고 안정적이다. 인터넷 쇼핑도 안 하고, 패션에 관심도 없고, 특별한 취미도 없고. 가성비 따지는 게 습관이라 마음에 든다고 쉽게 카드 긁는 일도 없다.

내일 아침으로 먹을 두유 (1900원)

집 앞 카페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잔 (4000원)

최애 아이돌의 메신저 서비스 정기결제 (4500원)

대부분 하루 지출이 만원 안팎을 오간다. 그마저도 식음료가 대부분이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만원에 행복?


평화로운 일상이 반복되던 중 그래프가 요동치는 날이 온다.

메가박스의 예술극장 아트나인에서 여름 플리마켓을 연다는 공지가 떴다. 예술영화를 주로 배급하는 작은 영화사들이 모여 자사 배급 작품들의 굿즈와 포스터를 판매하는 행사로 이전까지는 일 년에 두어 번 정기적으로 열었으나 코로나가 시작된 이래로는 오랜만에 여는 마켓이라고 했다.  


포스터를 야금야금 모으기 시작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동사서독>을 보고 장국영 특별전 증정품인 <춘광사설> 포스터를 받은 게 시발점이었다. 브런치 첫 글이 <동사서독> 이었이니 채 1년도 되지 않은 것이다. 그 마저도 눈에 불을 켜고 모으기보단 영화 볼 때 기왕이면 포스터 주는 극장에서 보기, 정도의 아주 가벼운 수집이다. 여태껏 모은 포스터도 7장뿐이니.


플리마켓은 아침 10시부터 번호표를 배부하고 12시부터 시작한다고 했다. 사고 싶은 걸 사려면 11시 전에는 가는 게 안전하겠지? 10시 34분에 도착해 받은 번호표는 138번. 한국 사람들은 포스터 사기 좋아하면 토요일 아침잠을 포기합니까? 예상보다 많은 인파에 (나만 예상을 못했던 거 같다)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12시. 입장은 50명을 단위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30분. 1시간. 한국은 예술영화 강국인가 생각했다.

13시 41분. 마침내.

입장과 동시에 점찍어놨던 영화사 A로 직행했다. 목표는 <500일의 썸머>. 두 가지 버전으로 준비해놨다던 포스터는 모두 품절이었다. 눈물이 났다. 그 옆에 있던 영화를 보지는 않았지만 예뻐 보이는 <루이스 웨인> 포스터를 샀다.

다음 행선지는 영화사 B. 목표는 <펄프픽션>. 판매 리스트 위에 도도하게 엎드려있는 우마서먼 언니의 얼굴 위에는 X표가 되어있었다. 아쉬움에 이마를 팍팍 쳤지만 그 옆에 있던 <녹색광선> 포스터를 가리켜 달라고 했다. 에릭 로메르의 영화는 한 편도 본지 않았다.

마지막 목표 <캐롤>. 영화사 C 앞에는 구매 줄이 없었다. 마니아층이 많은 작품인데 어째서.. 불안한 예감이 엄습했다. “모든 <캐롤> 굿즈 품절” 눈은 경직된 채 입매만 끌어올렸다. 생각해보니 마스크를 쓰고 있어 영화사분들은 나의 애써 침착한 미소는 보지 못하셨을 거 같다. 굳은 두 눈으로 <고스트 스토리> 엽서를 달라고 했다. 본 건 아니지만 엄마가 좋은 영화라고 했으니깐…


플리마켓을 나서면서 손에 든 포스터 11장과 굿즈 2종 중 내가 본 영화는 단 두 작품이었다. 날씨는 덥고 총 세 시간의 대기를 했는데 어설픈 손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일념으로 일궈낸 결과였다. 평소엔 갈팡질팡 계산기 두들기던 결단력이 눈 한번 뒤집히자 여기부터 저기까지 다 주세요 멘트를 남발하고 있었다. 분명 가벼운 수집 생활, 마음에 드는 건 세 작품 정도, 예쁘면 두장 정도 더 사야지의 마음으로 집을 나섰는데.


품절.

나의 그래프를 요동치게 만드는 마법의 두 글자.

1순위 없다고 2순위 3순위의 양으로 승부 보려 하는 나의 알 수 없는 가성비 체계.


집에 돌아온 내 양손에 무겁게 들린 포스터를 보고 엄마가 "돈 많이 썼겠네 3만 원 넘었겠는데? 너 소비가 과감하다"라고 했다.

엄마 나 4만 5천 원 썼어.

근데 엄마 .. 3만원이 '과감'의 범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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