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원문파일 작성 봉사 성공기

by 심그미

연초에 한밭도서관에서 '시각장애인을 위한 오디오도서 제작용 도서원문파일 작성 봉사'를 모집했다. 종이책을 시각장애인이 들을 수 있도록 오디오서적으로 만드는 것인데, 프로그램이 오디오로 변환할 수 있도록 원문파일을 따로 만드는 것이다.

이 공지를 읽었을 때 나는 뭔가를 자꾸 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오랜만에 솟아난 새해 초심이 채 가시지 않은 참이었다.

"이번 대운大運이 언니랑 잘 맞아. 언니,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아!"

명리학을 공부하는 친구가 건넨 말이 망설이는 내게 장작을 보태 주었다. 그래서 신청했다.

올해는 나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할 수 있는 인간이 되고 싶다. 긍지를 잃은 지 오래되었다.




내가 맡은 책은 유발 하라리 저 '넥서스'였다. 작성하고 싶은 책을 세 권 골라 신청하면, 중복신청은 선착순으로 정리하고 남은 것을 주는데, 나에겐 '넥서스'가 남았다. 읽고 싶은 책을 골랐기 때문에 별 불만이 없었다. 그동안 일상을 유지하는 것만 해도 힘들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때문에 봉사라는 의무감 아니면 이 책을 애써 읽을 정도로 힘을 내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책을 받고는 조금 설레기도 했다. 새로운 것을 시작한다는 기쁨이 있었다. 마침 봄이 오는 2월이었다.

파일 작성에는 몇 가지 규칙이 있었다. 줄 바꿈이나 문단 첫머리의 띄어쓰기, 따옴표나 괄호를 처리하는 기준, 한자와 영어를 입력하는 기준이 있었다. 책의 내용을 한글(프로그램)에 입력해야 해서 타이핑을 쳐야 한다. 타이핑을 수월하게 할 목적이라고 합리화하며 예쁘장한 무선 키보드도 하나 샀다.

아이들이 잠든 밤-적어도 10시 반은 지나야 한다-서랍에 숨겨둔 노트북과 책과 무선 키보드를 꺼내 혼자 거실이나 부엌에 앉아 타이핑에 빠져들었다. 책을 읽는 재미로, 키보드의 타건음을 즐기는 재미로, 평소보다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있다고 생각하며, 목표를 이루려면 노력이 필요하다는 교훈을 실감하며. 초심자의 속도는 눈부셨다. 책을 받은 첫 번째 주말에 무려 책의 서문부터 약 50페이지 정도를 입력했다. 손가락과 손목이 조금 욱신거렸지만 뿌듯했다. 600페이지 좀 못 되게 입력하면 되는 일. 이 정도 설렘과 속도로 열두 번만 더 하면 되겠네.

수학의 정석 1단원을 푼 뒤 남은 목차를 뒤적이던 어린 심그미처럼, 늙은 심그미는 그렇게 생각했다.



초심의 힘은 오래가지 않았다. 나는 내 열정이 마음에 쏙 들었다.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하루이틀 사이에 많이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다 보니 평일 밤마다 아이들과 더불어 늘어지게 잠에 빠졌다. 단잠에서 헤어 나오면 어김없이 출근준비를 할 시간이었다. 일주일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봄이 오고 새싹이 돋아나고. 아이들은 좁은 집안에 머무르기 싫어하고. 그런 주말에 우리는 차를 타고 교외로 나갔다. 숲 속의 놀이터, 공원 등 아이가 뛰어놀 수 있는 곳을 찾아가 마음껏 달리는 아이들의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다 보면 알찬 주말이 지나갔다. 피곤을 못 이겨 잠들어도 생각했다. 새벽에 깨어나면 하겠지. 하지만 깊은 새벽잠에서 깨어나도 초심의 그 정도 집중력이 돌아오지 않았다. 못 깨어나는 날이 더 많았다.

그래, 다음 주말엔 하자, 타이핑.

나는 내가 '봉사'라는 새로운-이타적이기까지 한-프로젝트를 시작한 사실을 주변에 꽤나 자랑했다. 심지어 이번 봄에는 주말마다 사람을 만날 기회도 많았다. 내 친구들에게 이건 이제 '넥서스 입력 봉사' 정도의 이름으로 불렸다. ("아, 너 '넥서스' 하는 거?" 이런 활용이다.) 내가 가진 나 중에서, 자랑하고 싶은 나를 가져본 것이 오랜만이다. 나는 내가 무언가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쏙 들었다. 하지만 이미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일상을 버티고 잠드는 평일, 아이를 돌보고 잠드는 주말이 두어 번 지나간 것 같은데 달이 바뀌었고 이제는 내가 초심을 되찾아도 해내기 어려울 것 같았다.

친구 지혜가 내 이야기를 기억하고 연락해 왔다. 책 몇 쪽을 사진 찍어 제게 보내라더니 이미지 속 문자들을 텍스트로 전환해 주는 사이트에서 휘리릭 전환해서 내게 보내주었다. 사이트 정보를 알게 된 나는 그날 밤 다시 신나게 사진을 찍어다 무료 OCR 사이트에서 텍스트 전환을 하고는 그것을 일일이 복사해 한글프로그램에 붙여 넣고 오타를 교정해 나갔다. 한 글자씩 일일이 입력하는 것보다 훨씬 빨랐다. 이 속도라면, 초심을 잃은 내가 초심을 되찾지 않더라도 해낼 수 있어! 대학에 처음 복사기가 도입되던 날, 유명한 교수님이 복사기 옆에서 축사를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손으로 쓰지 아니하고도 같은 글을 종이에 옮길 수 있으니 얼마나 편리한가" 뭐 그런 식으로 감탄하셨다던 거 같은데. 오늘 제가 그 감동을 감히 미루어 짐작해 보나이다.


OCR 사이트를 가르쳐 준 친구는 '언제든지 나도 도울게. 혼자 힘들어질 땐 말만 해!'라고 나를 격려해 주었다. 신기술에 눈 뜬 나는 다시 안심했다.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 때문에 하루하루 나아가기보단 언제나 신기술이라는 '한 방'이 있으니 괜찮다는 생각에 또다시 안일해졌다. 마음만은 이 봉사에 대한 끈을 놓지 않아서, 점심시간에라도 입력할 수 있도록 출근길에 늘 그 책을 들고 다녔다. 책의 무게를 견디는 내 어깨는 고되었으나, 일단 사무실에 앉은 나의 의지는, 시간 배분과 계획과 실천의 힘은, 어깨보다 훨씬 나약했다. 늘 책을 키보드 옆에 두고 표지를 들췄다 내렸다 했다. 나와 친한 윤희 님은 내 자리에 들를 때마다 한숨을 푹푹 쉬었다. "내가 보기엔 틀렸어. 지금이라도 빨리 포기해. 육아만 해도 충분히 힘들지 않아?" 나는 웃었다. "맞아요." 힘든 것이 사실이었다. 난 이걸 해낼 역량이 없는 것 같다는 것을,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도서관에 반납하지 않았다. 계속 가방에 넣고 출퇴근을 반복했다. 늘, 원문입력에는 별 소득이 없는 하루하루였다.


"도서 봉사는 어떻게, 잘 되어 가고 있어?"

언제든지 도와줄 수 있다던 지혜가 물었다. 정말 도와줄 작정인 것 같았다. 하지만 내 노력이 턱없이 부족한 채로 이것을 친구에게 부탁해서 완성한다면 나 자신에게 무엇을 느끼게 될까? 나는 일찌감치 포기하고 말았다고 대답했다. 그 후 친구는 입을 다물었고 나는 몹시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엄청난 자괴감이 몰려왔다. 한편으로는 진심으로 포기하고 싶었는데. 그런다고 한들 도덕적 지탄을 받는 것도 아니고 게으른 내가 여전히 게으른 것뿐일 텐데. 왜 이렇게 부끄럽지. 이거, 나 이대로 포기하면 안 될 것만 같다.

이제는 미룰 수 없다. 마감인 5월이 훌쩍 다가왔다. 좀 더 자주 사진을 찍어 OCR사이트로 변환을 하며, 오타를 교정하고 잠들었다. 무료 사이트는 하루에 15장의 이미지만 변환해 준다. 난 이 봉사를 열심히 한다는 명목으로 이미 키보드를 샀고, 더 이상 봉사를 위한 지출은 할 생각이 없어 무료 이용량을 착실히 지켰다. 기한이 다가와 점점 더 작업이 급해졌다. 스마트폰으로도 사진 기능으로 어느 정도 텍스트 변환이 가능하다는 걸 깨닫고 더 많은 사진을 찍었다. 책을 사진으로 찍어, 텍스트로 옮겨 교정을 보는 하루하루. 어느 날 새벽에는 남편이 내 책을 가져다가 스마트폰으로 열심히 책을 찍고 있었다. 그날 낮, 그가 정리한 텍스트 파일이 카카오톡으로 날아오기도 했다. 허허.

5월 하순이 되자, 사무실에서 나의 우선순위는 내가 보필해야 할 국장님과 내가 낙으로 삼으며 돌보는 난초들이 아니라 오로지 도서입력 봉사를 마치는 것이 되었다. 점심시간마다 약속이나 팀원의 걱정을 물리치며 자리에 붙어 앉아 교정을 보았다. 이쯤 되자 윤희 님도 나더러 포기하란 말을 하지 않았다.

"이제 100쪽 남았어요. 정말 얼마 안 남았다고." 헤헤 웃는 나를 보며 윤희 님의 표정은 '소용없어'에서 '기어이 놓지 않는구나'로 바뀌었다. "독하다, 독해." 그리고는 한 마디 붙였다. "띄어쓰기 정도는 챗GPT로 해요. 어지간한 교정도 다 봐준다고?"

그렇게 좋은 걸 왜 이제야 알려주는 거야.


챗GPT는 정말 뛰어났다. 띄어쓰기만 부탁했을 뿐인데 오탈자를 문맥에 맞추어 훌륭하게 다듬어 주었다. (몇 장 읽히고 나니 이를 토대로 더 깊은 글을 쓰거나 발표 준비를 할 수도 있다고 나서는 것이 아닌가! 이 대화형 AI의 발전이 눈부시다. 비록 난 그 AI를 경계해야 한다고 말하는 책을 읽히고 있었지만 말이다.) OCR로 책 본문을 읽히고 챗GPT로 띄어쓰기 교정을 하고 나니, 내가 해야 할 남은 일은 챗GPT가 교정한 어휘가 혹시 책과 다른 것이 있는지 찾아내고, 원문입력 지침에 맞게 따옴표나 괄호 등을 수정하는 것뿐이었다. 이대로 처음부터 했더라면, 세 달이 뭐야, 그 정도 시간은 필요치도 않았겠어!

그런고로 스마트폰과 노트북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나의 원문 입력 봉사는 기어이 끝을 보았다. 그렇게 내가 옮긴 책 한 권은 무려 429,688글자였다.

애써 만든 파일을 도서관에 전송하는 건 클릭 한 번이면 되는 너무나 쉬운 일이었다. "수고하셨어요." 메시지를 읽으며 속으로 대답했다. 맞아요, 저 이번에 꽤나 수고했습니다.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유발 하라리, 이 잔인한 교수님. 그림과 표는 원문 입력 시에 재량껏 생략할 수도 있는데, 이 책은 그토록 성경과 신화와 역사 일화를 인용하면서 단 한 장의 삽화도 집어넣지 않았다.

500쪽을 넘는 이 책을 입력하면서, 때로는 게으른 내가 싫어서 노력했고, 때로는 이 책을 내 봉사를 통해서 접하게 될 시각장애인의 삶을 생각하며 노력했다. 유발 하라리라는 지식인의, 여러 손을 거쳐 내게 온 이 책 속의 사유와 지혜를, 나와 다른 사람들의 손을 더 거쳐서 알지 못하는 누군가에게 전달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나보다 더 지성의 세계를 사랑할 누군가가 나를 통해 그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그게 나에게 쾌감을 주는 지점이었다. 그런 아름다움 곁에 스치는 일을, 다시 하고 싶다.

"축하해, 주영아. 다음엔.. 이런 장기 프로젝트 말고 다른 봉사를 찾아봐."

지혜의 조언도 잘 귀담아들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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