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미국영어 VS 영국영어
한국에서 나고 자란 나에게 영어란, 미국식 영어 한 가지뿐이었다. 영국식 영어의 존재여부도 알지 못했다.
한국은 국제 비즈니스 업무 및 과학, 기술, 대중문화 등이 미국식 영어로 사용된다. 미국은 한국전쟁 이후, 주요 동맹국이자 지원국으로 한국 문화와 언어에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뉴질랜드는 영국의 영향을 받았다. 와이탕이 조약 체결로 영국에서부터 이민자가 들어오며 자리를 잡았고, 이로 인해 공공기관, 법률, 교육 시스템이 영국식 기준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래, 역사적인 이유에서라면 받아들여야지.
그런데 난 단지 버거 세트가 먹고 싶다고!
아이들의 방과 후 간식을 사기 위해 맥도널드로 향했다. 날씨가 좋았고, 대기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다행히 아이들을 늦지 않게 픽업할 수 있을 것이라는 안도감이 들었다. 호기롭게 드라이브스루로 가서 메뉴를 살폈다.
'빅맥 세트랑 하나랑... 치즈버거 세트 1개씩 사야지.'
내 주문차례가 됐다. 생각해 둔 메뉴를 주문하기 위해 몸을 창문 너머 기계 앞으로 가져다 댔다.
"Can I have a BigMac Set and..."
주문을 마치기도 전에 직원의 당황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Sorry, BigMac…what?!"
아무래도 직접 마주 보고 대화하는 것이 아니기에 못 들었을 수도 있겠다 싶어 다시 한번 큰 소리로 말했다.
"BicMac SET!"
"(조용)................."
새소리, 차 소리, 여러 가지 소리가 떠다니던 주위가 멈춘 듯 조용해졌다. 온 세상이 내 영어를 다시 듣기 위해 기다리는 것 같았다. 당황스러움이 올라왔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한번 얘기했다.
"빅. 맥. 세. 트! It means a burger with French fries and a Coke."
통화가 끊긴 듯 조용히 듣고 있던 직원이 이렇게 말했다.
Ah~! Combo!!!
'으응...? 뭐? 콤보....?'
마치 꽁꽁 엉켜있던 수수께끼의 실마리를 푼 탐정처럼 그는 웃으며 나에게 말했다.
"우리는 버거와 감자, 콜라가 같이 나오는 것을 '콤보'라고 말해."
'콤보...?'
나는 실제로 30년 동안 그 단어를 '세트'라고 알고 문제없이 사용해 왔다. 그런데 뉴질랜드에 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니야, 그 단어는 사실 ‘세트’가 아니라 '콤보'였어. 몰랐지?'라는 소름 끼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머릿속을 정리하기도 전, 또 한 번의 반전이 나를 덮쳤다.
"그리고 우리는 감자를 Chips'라고 해." 직원은 말했다.
‘또? 뭐? 칩스…?’
두 번의 반전을 연타로 맞자 청개구리 심보가 가슴속에서 꿈틀거렸다. '왜?! 나는 프렌치프라이라고 말하고 싶은데! 그냥 프렌치프라이라고 말할래! ' 어린아이처럼 괜한 떼를 부리고 싶었다.
하지만 성숙한 어른의 자세로써 받아들여야 한다.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라야 하는 법!
"아- 그래?! 알려줘서 고마워. 빅맥 콤보 하나랑 주니어 콤보 하나 부탁해!"
텅텅 비어있던 드라이브스루에서 결재를 마치고 나오는 길. 내 차 뒤로 길고 긴 줄이 생겼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알아들었을 만도 한데, 꼭 그 단어를 사용해야 하는 것은 미국식 영어와 영국식 영어의 자존심 대결인가?’
프렌치프라, 아니 칩스 한 개를 입 안에 구겨 넣으며 바뀐 입장을 상상해 봤다.
타국에서 태어나 살다가 한국으로 오게 된 친구 A.
A가 나에게 웃으며 다가온다.
“오늘 한국어수업 다녀왔거든. 거기서 동무(북한에서 ‘친구’를 뜻하는 단어)를 한 명 사귀고 왔어. 나랑 동갑이래~”
이런 상황이었다면 나는 어땠을까?
또는, A가 “사장님~다마네기(玉ねぎ, 양파) 얼마예요? “, “여기, 와리바시(わりばし, 나무젓가락) 한 개 주세요~“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면 나는 뭐라고 얘기했을까?
".................???"
그 단어를 알아듣지 못한 나도 물음표 가득 한 얼굴로 A를 바라보고 서 있을 것 같았다.
이렇게 상상해 보니 그 직원이 왜 내가 사용한 단어를 고쳐줬는지 이해가 됐다. 그들의 문화에서 사용하는 단어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그들의 어휘문화를 알려줬던 것이다.
'나는 외국스타일이야.'라고 착각했던 나에게 또 하나의 교훈이 생겼다.
문화 이해와 존중, 관계 형성과 신뢰를 쌓을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도구.
어린아이처럼 고집부리지 말고, 그 도구를 잘 준비하고 닦아나가야겠는 생각이 들었다.
외국 생활 Tip, 그 나라에서 사용하는 살아있는 단어와 발음을 익혀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