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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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나의 비겁한 선인장이여. 고달픈 나날들에 눈물로 얼굴을 물들이나니
사랑하여 가엾은 그대 뒷모습에 차디찬 비소만을 남기었고
거머쥐지 못한 혼잡한 손바닥 거미줄에 자꾸만 몸이 쇠약해진다
보아라. 그리고 만져라. 이제 곧 열려버릴 세상에 대하여
작은 것을 곁에 두어라. 그들은 특별할 지어다-
*
토요일 오후 자습이 끝나고 공부를 더 해보려 교실에 혼자 남았다.
가진 푼돈으로 학교 옆 분식집 주먹밥을 사, 빈 교실 구석 자리에 앉아 대충 저녁을 때웠다.
오랜만에 둘러보는 빈 교실의 크기가 매우 커다랗다.
어쩐지 교실에 감도는 적막의 무게가 나를 꾹꾹 누르는 것 같아 순간 머리에 심한 빈혈기가 돌았다.
한참 '여기가 환상이다, 현실이다' 되뇌다, 한시가 바쁜데 변변치 않은 걸 구분하고 있는 스스로가 한심했다. 그냥 아까 마저 듣던 영어 듣기 모의고사 18번 문제를 풀기로 했다. 이어폰 속 들리는 소리에 귓구멍은 원어민 남녀가 떠드는 대화의 주제를 파악하고, 그에 합당한 핵심 단어를 연결된 두뇌에 자동으로 축적시켰다.
습관이란 게 이리 무서운 거다. 그러다 문득 잡생각이 들었다.
'이런 내 모습을 누군가가 바라보고 있다면 어떨까?'
아이들이 모두 떠난 칙칙한 빈 교실, 불을 켜고 구석진 자리에 혼자 앉은 나, 입 속에 밥을 처넣으며 그새 불안해져 이어폰을 꽂고 문제를 푸는 나, 그러다 외로이 코를 훌쩍이고 있을 나에 대해서.
뜻 모를 공부를 한답시고 이 영양가 없는 대화소리에 눈과 귀를 막아야만, 나는 조금이나마 안심해 생계를 겨우 입에 집어넣을 수 있는 것이었다.
내가 고장 났나? 서러웠다.
쿵쿵-
얼토당토않은 상상에 파묻힌 내게 찬물을 끼얹은 것은 바로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였다.
쿵쿵!
잠가놓은 교실 뒷문을 연신 발로 차는 소리 때문에 난 깜짝 놀라 듣던 것을 멈추고 눈을 크게 떴다.
예상치 못하게 벌어진 상황에 다리가 떨리는 만큼 공포가 엄습했다.
누굴까. 누굴까.
“... 나가!”
발로 문을 뻥뻥 차댄 사람은 단 한번 마주한 적 없는 교장이었다. 일전에 교내 방송으로 질리도록 듣던 목소리라 단번에 알아챘다. 나는 서둘러 '네..네.' 답한 뒤, 다시 조용해진 교실에 멍하니 서있었다.
나로부터 시야가 멀어지고 교실에서 나아가 이 교정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홀로 서있는 난장이 같은 내 모습을 떠올리며, 내게 밀려오는 충격을 견디려 애썼다.
갑자기 세상 온갖 공기 입자들이 빠르게 진동하며 나를 향해 와글와글 부딪히고 튕겨나가는 듯한 강한 압박이 느껴졌다.
'나, 당신이 그토록 바라던 착한 학생이라고!'
때 아니게 찾아온 공황과 모멸감에 나는 교실을 도망치듯 뛰쳐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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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나의 비겁한 선인장이여. 고달픈 나날들에 눈물로 얼굴을 물들이나니
사랑하여 가엾은 그대 뒷모습에 차디찬 비소만을 남기었고
거머쥐지 못한 혼잡한 손바닥 거미줄에 자꾸만 몸이 쇠약해진다
보아라. 그리고 만져라. 이제 곧 열려버릴 세상에 대하여
작은 것을 곁에 두어라. 그들은 특별할 지어다-
*
무작정 뛰어나온 교실 밖은 어두웠고, 이제 막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후두두, 후두둑.
추적추적 내리는 비가 내 마음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표현이 너무 상투적이라 마음에 안 들었다.
나는 학교 밖 운동장 벤치에 털썩 주저앉아 앞을 주시했다.
‘푸우-’
한숨을 뿜으니 입김이 새하얗게 흩어지는 게 눈에 보였다. 바깥공기가 그새 차가워진 것이다.
발밑을 보니 밟아 으스러져 비에 젖은 붉은 낙엽이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늦가을쯤이라는 것도 지금에서야 알았다.
눈을 감아보니 온몸을 관통하는, 차고 축축한 바람과 나무에 매달린 잎들이 흩날리며 서걱이는 소리가 귓가에 와닿는다. 내가 아닌 많은 것들이 숨 쉬는 게 보이고 스치며, 들렸다.
그들은 내게 살아있냐고 되묻는 듯했다. 그제야 숨통이 좀 트였다.
깝깝한 머리가 식으니 나는 지금 우산도 없고, 갈 곳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몹시 춥다는 사실도.
머릿속 정보들이 과부하된 지는 오래여서 생각은 하고 싶지 않았다.
머릿속 정보들이 과부하된 지는 오래여서 생각은 하고 싶지 않았다….
애꿎은 낙엽 부스럼만 자꾸 짓이겼다.
바람을 듣고, 내뿜은 입김 속에서 나뭇잎들이 춤추는 것을 바라보기 좋았다.
오랜만에 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어디론가 갈 필요도 없었기 때문에.
그때였다 그가 찾아온 건,
발렌타인(valentine).
보자마자 네 이름도 마땅히 알겠다.
그는 얼음신사였다. 차가운 백색 피부에 푸르스름한 반사광이 나는 흰 정장을 입은 발렌타인은 키가 나보다 두 뼘정도 더 컸다. 그는 내게 빨강 우산을 건네며 주저앉은 나를 보고 눈으로 웃었다. 오랜만에 마주하는 누군가의 눈이다.
그 눈망울 아래 걸친 안식에 감사하며 우산을 받으려니, 문득 눈에 띄는 게 그의 손바닥이다.
발렌타인은 겉으로 보이는 모든 게 하얗거나 푸르스름했는데, 손 안쪽만큼은 내가 밟고 서있는 낙엽보다도 붉었다. 이 우산에 물이 들었나?
반면, 잠깐 스친 낙엽 같은 손이 굉장히 따뜻했다.
갈피를 못 잡고 있던 난 마치 언제 그랬냐는 듯 마음이 홀가분했다.
한 손에는 그가 준 우산을, 나머지는 발렌타인 손을 맞붙잡고 가로등 불빛이 흐릿한 빗속으로 함께 나섰다.
- 계속.
움직이는 화랑 <비껴서기> 운영 |
인문 칼럼니스트 |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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