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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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꿈꾸었던 너를 떠올려
현재를 증명할 만한 것은 현재 일뿐,
내가 아닌 주변의 것들도 모두 고동으로 잠식하고 있으니 너를 사랑한다
*
발렌타인과 내가 도착한 곳은 황금빛 조명이 반짝이는 도심의 골목 한가운데 작은 카페였다.
거기서 우리는 분홍색 커피를 마셨다. 그는 일절 말이 없었으나 나는 드물게 안도했다.
하늘이 보라색으로 물들며, 파란 비가 내리고 짙은 초록달은 발렌타인 어깨를 살포시 비춘다.
주변을 둘러보니 거리는 분주하거나 한산하지도 않았으며 분홍 커피에 비치는 내 표정도 나쁘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가 함께라 좋았다.
카페를 떠나 우리는 찬란한 거리를 산책하러 나섰다.
거리에 수많은 색으로 수놓는 불빛은 온 세상을 그들만의 빛깔로 연주하는 듯 황홀했다.
알록달록 빛의 항연을 천천히 거닐다, 어렴풋이 보이는 시야로 길 한가운데 어린 소년이 보였다.
아이는 빨간 가로 줄무늬가 새긴 노란 옷차림이었는데 얼굴 이목구비는 비어있고, 밀랍인형처럼 굳은 팔은 양쪽으로 뻗어 빳빳이 움직이지 않았다. 아이는 허수아비와도 흡사했다.
나는 어쩐지 처연한 마음이 들어 아이에게 다가가, 온 마음을 다해 와락 끌어안았다.
말이 없는 아이를 품고는 ‘왜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니?’라는 생각만 수백 번 되뇌고만 있었는데, 그러자 그 애는 찬찬히 얼굴을 드러냈다. 하강하는 이 파란 빗물들은 우리 눈물이었나 보다.
마침내, 소년은 빳빳한 몸을 간신히 움직여 나를 안아주었다. 소년도 나도 지그시 눈을 감았다.
“난 버리고 네 앞길을 가는 것이 나아. 어서 가.”
갑작스레 들리는 말에 나는 침묵했다. 네 말에 실리는 왠지 모를 직감을 느꼈으니.
그래 네 말대로, 빛이 수없이 흔들리며 흩어지는 저 앞길을 향해 나는 가고자 했다.
왜냐하면, 정말이었다. 너를 두고 애써 외면 한 채로, 이렇게 앞으로만 나아가는 것이 날 영원히 지고지순한 모범생으로 살게 할 것이고, 남들에게는 부러움을 살 것이며 '성공'의 영광을 꿈꾸며 만족해 버릴 테니까. 그냥 이따금 너를 생각하며 씁쓸해하면 그만이겠지.
그 밖에 길은, 모두 지워진 슬픈 세상이니까.
난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으니까.
- 4 -
오, 나의 비겁한 선인장이여. 고달픈 나날들에 눈물로 얼굴을 물들이나니
사랑하여 가엾은 그대 뒷모습에 차디찬 비소만을 남기었고,
거머쥐지 못한 혼잡한 손바닥 거미줄에 자꾸만 몸이 쇠약해진다
보아라. 그리고 만져라. 이제 곧 열려버릴 세상에 대하여
작은 것을 곁에 두어라. 그들은 특별할 지어다-
*
안녕안녕, 아이와 작별인사를 하면서도 석연치 않았다.
다시 발렌타인과 함께 산책하던 길을 다시 나서기까지도 말이다.
마을 외곽으로 갈수록 인적은 드물었다.
멀어지는 건물들은 뒤로, 앞에는 밤하늘이 더 넓고 드높게 펼쳐진다.
내리던 비도 서서히 그쳐가, 지금은 주변 공기들이 푸르게 반짝인다.
수많은 별빛들이 내 숨소리에 맞추어 춤을 추는 것만 같았다. 무척이나 아름다워 경이롭다.
백야(白夜)가 아니라 자야(紫夜)라고 해야 하나.
이윽고 어디선가 훌쩍이는, 네 우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앞서 가던 발걸음을 잠시 멈추었다.
미약한 투정 어린 울음소리에 순간, 정신이 들었다.
동시에 나는 네 손을 놓치고는
'이건 아니야, 발렌타인.'
아까처럼 발렌타인 당신은 살포시, 눈으로 웃으며 공기처럼 홀연히 흩어졌다.
남은 한 손에는 그가 주고 간 빨간 우산이 들려있었다.
나는 네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황급히 주변을 살폈다.
보라색 밤공기와 나를 둘러싼 푸른 물방울들은 저 앞에 뻗은 지평선으로 빠르게 물러났다.
모든 게 물러난 바로 아래, 나지막한 길턱에 주저앉아 홀로 울고 있는 네가 있다.
그리고 보았다. 만졌다. 이제 곧 열려버릴 세상을.
네 눈물에 맺힌 무겁고 뜨거운 마음들은 곧 빳빳하게 굳어지는 몸과 마음처럼, 그 누구도 안지 못했던 어린 소년과도 같은 회색 세상에 달리하여 뿜어 나는 찬란한 아우라라!
늘 꿈꾸었던 너를 떠올려
현재를 증명할 만한 것은 현재 일뿐,
내가 아닌 주변의 것들도 모두 고동으로 잠식하고 있으니 너를 사랑한다
황급히 뒤를 돌아선 나에게,
“돌아왔구나, 그래.”
너는 기다렸다는 듯 내게 달려와 안겼다.
따뜻한 손의 얼음신사는 이제 없지만 거기에는 네가 있었다.
생채기만으로 남아있던 네가.
그래. 나는 너를 사랑한다
Valentine(발렌타인). 너는 나의 -
- 마침.
| 발렌타인. 너를 만난 이야기.
움직이는 화랑 <비껴서기> 운영 |
인문 칼럼니스트 |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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