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명상
참선에는 묵조선과 간화선이 있다.
묵조선은 고요함으로 진리를 깨닫는다.
간화선은 치열함으로 깨닫는다.
고요한 묵조선과 치열한 간화선은 깨달음이라는 봉우리에서 만난다.
상담과 명상도 마찬가지이다.
명상이라 하면 보통 침묵을 떠올린다.
고요함 속에서 움직이지 않고 자신을 들여다보는 이미지가 상징처럼 여겨진다.
그래서인지 활동적인 사람들은 명상이 자신과 맞지 않는다고 손사래를 치곤 한다.
이 또한 왜곡된 고정관념이다.
명상은 엄청난 역동성을 담고 있다.
모든 움직임을 멈추고 마음을 잔잔하게 가라앉혀서 들여다보는 묵조선에는 활동성이 없어 보인다.
그런데 실제로 해 보면 어마어마한 움직임이 느껴진다.
몸과 마음을 가만히 놓아두면 미세한 작은 움직임까지도 감각에 포착되면서 격렬한 역동이 밀려온다.
겉으로 보기에 움직임이 없이 고요한 것 같지만 앉아있는 사람은 내면의 격랑에 휩쓸려 있기 쉽다.
묵조선이 이러할진대 간화선은 오죽할까.
간화선은 말 그대로 '화두(話頭)를 간(看)하는' 명상법이다.
풀고자 하는 의심을 집중해서 바라보는 방식으로 모든 잡념을 떨쳐내고 답을 찾으려 한다.
화두란 간절히 풀고 싶은 의문이다.
오로지 화두에 집중하면서 생활을 한다.
간절함으로 집중하기에 잡념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상담에서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를 다루는 방식에 묵조선과 간화선을 응용할 수 있다.
섣불리 단정 짓는 방식으로는 문제의 핵심에 도달하기 어렵다.
침착하고 차분하게 들여다보아야 문제의 실제가 보인다.
문제를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 때 묵조선의 방법론이 쓰인다고 하겠다.
물론 문제를 구체화하고 초점을 잡아가는 내용은 간화선의 방법론과 맥을 같이 한다.
상담은 쌍방통행이다.
상담자와 내담자가 상담 목표를 이루기 위해 힘을 모은다.
철저히 자신의 내면과 오롯하게 만나고자 하는 명상과 공감과 소통을 활발하게 하는 상담은 아주 성질이 다른 활동으로 보인다.
그런데 명상이 그냥 자신을 파헤치고 들어가는 방향으로만 가면 엉뚱한 길로 갈 위험이 있다.
실제로 명상을 한다는 사람들이 이상한 사고방식이나 행동방식에 빠져서 일상의 삶을 살지 못하는 경우도 제법 많이 있다.
명상도 일상의 삶이라는 영역을 떠나서 일방적으로 치달리면 위험하다고 하겠다.
명상이 마음을 깊이 파고드는 과정이라면 상담은 마음을 폭넓게 넓히는 활동이라고 볼 수 있다.
깊이 파려면 넓이도 확보해야 한다.
명상이 조화와 균형을 잡아가는 상담을 담을 때 샛길로 빠지지 않고 본래 목적을 이루는 길로 나아갈 수 있다.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인간을 관계를 떠나서 알려고 하는 것 자체가 이미 모순이다.
자기 마음만 살피려고 해 보라.
바로 자신을 잃어버리고 만다.
우리는 모두 인연의 그물망으로 얽혀 있는 존재들이다.
어느 한 부분을 떼어내어서 그것을 깊이 연구한다고 해서 진실을 발견할 수는 없는 일이다.
오히려 연구한 그 부분마저 제대로 알기 어렵다.
어느 한 극단으로 자신을 몰고 가면 자신을 잃어버린다는 말이다.
명상은 일상을 떠나서 하는 것이 아니다.
명상을 해서 일상생활이 더욱 풍요로워지는 것이 자연스럽다.
명상의 영역과 일상의 영역이 구분되는 만큼 명상은 헛된 길로 빠지고 만다.
내면과 일과 관계의 균형을 맞추고 조화를 이루고자 하는 상담이 오히려 명상의 기본이 되어야 한다.
상담은 담은 명상은 일상을 풍요롭게 하는 훌륭한 방법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