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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깜지 Sep 19. 2024

백마 탄 왕자님

<1부> 사랑과 낭만에 관하여

 나의 가장 마지막 연애의 주인공이었던 나나는 본인이 가장 힘든 시기에 내가 찾아왔다고 말해주었다. 7년 사귄 남자친구에게 갑작스러운 이별통보를 받은 상태에서 카페 사업이 망해 일을 하지 않은 날들이 지속되었고 가정환경도 계속 흔들리고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우울증까지 찾아오게 되며 힘든 나날을 보내던 중 내가 찾아왔으니 한줄기 빛이었으리라. 실제로 나나는 겉으론 밝은 아이였지만 항상 불안해하고 어두운 아이였다. 반대로 나는 너무나 낙천적이고 낭만적이었으니 그래서 내가 좋았다고 한다. 특히 거칠었던 전남자친구와 비교하면서 말이다. 


 아무튼 나나는 매번 나를 '백마 탄 왕자님'이라는 낯간지러운 별명으로 부르곤 했다. 그런데 나는 그 별명이 싫었다. 한 사람과 연애기간이 길었던 것뿐이었지 연애 경험이 적은 나나가 보기에는 연애는 누군가 자신을 구원해 줄 대상을 쫒는 거라 여겼다. 반대로 연애를 몇 번 더 해본 나는 과거엔 공감할 수 있었겠으나 지금은 연애, 즉 사랑은 동등한 관계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야 함을 절실히 피부로 느끼고 있었으며 수많은 후회와 자책을 통해 배우게 된 사실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 교훈을 나나에게 알려줄 의무가 있었다.


 '나나야, 잘 들어. 나는 백마 탄 왕자님이 아니라 그냥 백마야'. 이 말에 나나는 크게 빵 터져 웃고 말았다. 예상치도 못한 답변에 놀랐다고 한다. '네 인생의 주인공은 너니까 네가 왕자님 해야지. 나는 너를 도와 함께 여행을 떠날 백마가 되어줄게. 같이 인생이란 모험을 떠나보자'. 백마가 되어준다니, 내가 생각해도 웃겼다.


 나나는 내가 피부가 매우 하야니 백마가 좀 더 어울리는 게 맞다고 해서 한번 더 우리는 크게 웃었다. 당시 결혼 얘기가 어느 정도 오갔던 상황이었기에 일종의 프러포즈 같은 멘트가 되어버렸다. '프러포즈 같은'이 아닌 정말 그렇게 갑작스럽게 프러포즈를 했었다. 지친 현실 속에서도 우린 일심동체가 되어 인생이란 모험을 떠나는 순간이었다.


 로맨틱한 사랑은 백마 탄 왕자님이 찾아와 나를 구원해 주는 사랑을 꿈꿀 수도 있겠지만 낭만적인 사랑은 그렇게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낭만적인 사랑은 모험과도 같다. 언제 어떤 위험이 닥쳐올지 모른다. 그리고 힘겹게 이겨내기도 가끔은 패배해 멈추기도 한다. 그렇지만 일련의 모든 모험의 여정이 전부 낭만적인 사랑을 이루는 추억의 파편들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니 사랑의 여정을 떠나려면 단단히 모험을 떠날 채비를 해야 되지 않는가. 내가 기꺼이 백마가 되어 궂은일을 할 테다! 나의 순결하고 흰 피부에 흙탕물이 튈지언정. 왕자님도 마찬가지다. 나의 등 위에서 힘겹게 왕자님만의 싸움을 해나갈 것이다. 결국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며 모험을 해야한다. 나나에게 사랑의 낭만은 로맨스 소설이 아닌 판타지 어드벤처 소설임을 일깨워주는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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