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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깜지 Oct 13. 2024

화이트 레이디

<1부> 사랑과 낭만에 관하여

 화이트 레이디, 진을 베이스로 하는 클래식 칵테일 중 하나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칵테일 중 하나이자 사랑하고 싶은 이에게 꼭 잔을 건네주는 술 중 하나이다. 나에겐 '화이트 레이디'는 가장 순수하며 이상적인 사랑을 의미한다. 동시에 사랑의 이면인 아픔과 슬픔도 포함한다. 나의 낭만적인 사랑을 담고 있는 칵테일이다. 그래서 하얗고 순수한 사랑의 결정체를 화이트 레이디에 담아 사랑하는 이에게 건네는 것은 나의 낭만이 거행하는 사랑의 의식이라고 보면 된다. 사랑하는 이도 화이트 레이디를 마시면서 낭만적인 사랑에 물들었으면 했다. 그래서 그녀도 나를 향해 덧 없이 하얗고 순수한 사랑을 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그리고 아픔과 슬픔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랑을 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함께 화이트 레이디를 마셨다. 그렇게 나는 나의 낭만적인 사랑을 선물해 주곤 했다.


 우연히 방문한 어떤 작은 칵테일 바였다. 나는 그곳에서 처음으로 '화이트 레이디'를 접하게 되었다. 처음부터 화이트 레이디를 찾아다녔던 것은 아니었다. 핑크 레이디를 찾다 보니 화이트 레이디를 우연히 알게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무튼, 내가 '핑크 레이디' 칵테일을 찾아다녔던 이유는 웹툰 '핑크 레이디' 때문이었다. 나에게 처음으로 사랑과 낭만에 관한 이정표 역할을 해준 내가 사랑하는 웹툰인 바로 그 '핑크 레이디'. 웹툰 '핑크 레이디'는 칵테일 '핑크 레이디'에서 따온 제목이었다. 나에게 이 웹툰은 나의 인생을 바꿀 정도로 의미가 남달랐다. 그래서 이 웹툰을 보며 사랑을 꿈꿨던 고등학생일 때부터 언젠가 성인이 되면 꼭 사랑하는 사람과 핑크 레이디를 마셔보겠노라 다짐했었다. 핑크 레이디를 마심으로써 웹툰의 주인공들처럼 낭만 가득한 핑크빛 사랑으로 물들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때의 나의 낭만적인 사랑은 '화이트'가 아닌 '핑크'였으니까.


 여주인공인 겨울이는 그 누구보다 핑크 레이디 그 자체였던 소녀였다. 어렸을 때부터 핑크색을 좋아해서 핑크색 옷만 입었다. 핑크색은 그녀에게 있어 자신의 아이덴티티이자 솔직한 본모습이며 자신을 사랑한 또 하나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주변 또래 아이들은 핑크색으로 물든 그녀를 촌스럽다고 놀렸다. 그러나 그녀의 소꿉친구이자 연인인 남주인공 현석이는 핑크빛 그녀를 사랑했다. 어린 마음이었지만 그 누구보다 순수한 사랑이었다. 그의 사랑은 그녀의 핑크색으로 물든 사랑이었다. 시간이 지나 성인이 되어 서로가 다시 만났을 때도 그녀는 여전히 핑크 레이디였다. 시간이 지나면 자신의 색을 잃어버릴 법도 한데 그녀는 자신의 순수성과 색깔을 그대로 지키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 역시 오랜 시간 사랑을 핑크색으로 간직했었고 그녀 역시 핑크색을 잃지 않았던 것이었다. 바텐더였던 현석이는 그녀에게 '핑크 레이디' 칵테일을 건네주었다. 자신의 사랑도 그녀와 같은 '핑크'였음을 고백하기 위해.


 나는 현석이의 핑크빛 사랑처럼 나 역시 핑크빛으로 물든 낭만적인 사랑을 꿈꿔왔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과 핑크 레이디 칵테일 잔을 부딪히고 싶었다. 그러나 나의 이런 바람이 무색하게 주변 어떤 칵테일 바를 찾아다녀도 메뉴판에 핑크 레이디라는 이름은 없었다. 아쉽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내 기억 속에 핑크 레이디는 잊혀갔다. 내 마음속에 핑크가 지워졌다. 그래서일까, 첫사랑도 내게 지워졌다. 아니, 내 마음속에 핑크는 내가 지웠다. 첫사랑도 내가 지웠다. 내 마음속엔 칠흑처럼 어두운 검은색의 공허만 남았다. 이런 나의 공허한 마음에 칵테일을 채워 넣으면 위로가 될까 싶어 '로어스'라는 작은 칵테일 바에 들렀다. 바로 그곳에 '화이트 레이디'가 있었다. 


 내가 칵테일 바를 많이 다녀본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대게 대중적인 칵테일들은 몇 가지 알고 있었다. 그러나 화이트 레이디는 정말 처음 본 칵테일이었다. 물론 칵테일에 대해 잘 아는 사람들은 화이트 레이디가 전통이 깊은 클래식 칵테일로써 명성이 높다는 사실을 잘 알겠지만 아쉽게도 나는 칵테일에 조예가 깊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화이트 레이디'를 본 순간 그동안 잊혀있던 '핑크 레이디'가 떠올랐었다. 바텐더에게 여쭤보니 '핑크 레이디'는 '화이트 레이디'에서 파생된 변형 칵테일이고 조금 더 단맛을 내기 위해 핑크색 빛깔이 나는 그레나딘 시럽을 추가한 칵테일이라고 말씀해 주셨다. 단순히 이름이 겹치는 우연이 아닌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는 칵테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니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묘한 끌림을 화이트 레이디를 통해 받게 되었다. 마치 잊고 있었던 사랑과 낭만의 두근거림을 다시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화이트 레이디라는 가녀린 이름과는 달리 맛은 생각보다 쓴 맛이 강했다. 화이트 레이디가 '귀부인'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을 고려하면 소름 끼칠 정도의 쓴 맛이 있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할지 모르겠다. 달콤함이 느껴질 거라 예상을 비웃듯 쓰고 신 맛이 내 혀를 강타했다. 마치 사랑은 이처럼 쓰다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해 쓰라린 체벌을 받는 것과도 같았다.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오지 못한 나의 비참한 현실을 화이트 레이디에 모두 담아 마셨다. 이때부터 나의 낭만적인 사랑은 '핑크 레이디'가 아닌 '화이트 레이디'로 바뀌게 되었다. 


 이날 이후로 새로운 사랑들과는 항상 '핑크 레이디'가 아닌 '화이트 레이디'를 마셨다. 화이트 레이디를 통해 나의 낭만적인 사랑을 함께 나누고 싶어서였다. 아쉽게도 나는 현석이와 겨울이 처럼 핑크빛으로 물든 달콤한 사랑엔 실패했었다. 그러나 사랑에 있어 어떠한 방식으로든 아픔과 슬픔도 존재하는 법, 그 아픈 사랑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리고 나누고 싶었다. 낭만은 로맨틱이 전부가 아니란 것을. 


 화이트 레이디를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마시다 보니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있었다. 웹툰 속 겨울이는 핑크색으로 물든 달콤한 사랑의 주인공인 '핑크 레이디'였다면, 나의 그녀는 어두운 조명 아래 공허한 칵테일 잔을 유유하게 홀로 빛낸 '화이트 레이디' 였음을. 나의 어둠을 밝혀줄 '화이트 레이디'가 바로 그녀였음을. 나의 사랑은 하얀색으로 물든 사랑이었다. 나의 사랑도 그녀와 같은 하얀색이었음을 그녀에게 고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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