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사랑과 낭만에 관하여
유명 웹툰 '유미의 세포들'의 주인공 유미의 프라임 세포는 '사랑'이다. 그녀의 프라임 세포가 '사랑'인 이유는 그녀의 절대 가치 중 가장 강력하고 우선이 되는 가치가 바로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 외 다른 캐릭터들 역시 각자가 더 우선으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관에 따라 프라임 세포가 다르다. 더 나아가 최우선으로 중요시되는 두 개의 가치관이 있다면 융합형 프라임 세포로 합쳐 시너지 효과를 내기도 한다. 나에게도 머릿속 세포가 만일 자아가 있었다면 아마 '사랑'세포와 '낭만'세포가 합쳐진 융합형 프라임 세포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그래서 항상 사랑을 생각하면 낭만도 따라오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낭만적인 사랑은 행복하고 로맨틱하며 이상적인 꿈을 꾸는 사랑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다툼과 갈등은 용납할 수 없었다. 낭만적인 사랑은 운명적이고 완벽하며 사랑하는 사람과 내가 완전히 일치하는 사랑이라 여겼다. 그래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다면 낭만적인 사랑 또한 지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내가 더 많은 사랑을 줄 수 있다면, 그렇게 함으로써 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보호할 수 있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나'라는 목장의 울타리는 사랑과 낭만으로 견고했다. 그래서 외부에 어떤 위험이 찾아와도 사랑하는 사람을 지킬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나의 울타리 안에 그녀를 가두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면 영원함이 찾아올 것이라 착각했다. 그러나 영원불변함은 없었다. 몇 번의 후회와 자책 끝에 진정한 원인을 찾게 되었다. 사랑했던 사람들이 울타리 밖을 벗어난 이유는 외부의 문제가 아닌 나였음을. 내부에서부터의 문제였음을 깨달았다.
울타리는 보호가 아니었다. 그녀를 가둔 장치에 불과했다. 나의 울타리에 갇혀 그녀 자신만의 울타리가 더 이상 커질 수 없었다. 그녀가 성장할수록 울타리를 확장해서 더 사랑을 키웠어야 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의 울타리 때문에 사랑이 더 커질 수 없었다. 처음에는 보호받는 느낌이었기에 안정감을 느낄 수 있었으나 그 순간뿐이었다. 결국 나는 그녀의 성장을 막는 통제와 억압의 울타리였던 것이다.
나의 울타리 안에서 보호를 받고 있는 만큼 그녀 또한 나의 질서와 가치관을 따라야 했다. 그것은 바로 ‘낭만’이었다. 사랑과 함께한 낭만은 달콤하고 치명적인 유혹이며 이상이었다. 그러나 너무 낭만과 이상을 추구한 나머지 가끔은 현실적으로 문제를 바라봐야 할 순간에도 나는 그녀에게 억지로 낭만을 강요했다. 그래야만 내가 생각한 완벽한 사랑을 추구할 수 있으리라 착각했었다. 그러한 현실 도피적인 선택들이 이어지다 보니 그녀가 원치 않는 현실에 도달하게 되었고 이는 또 다른 문제들을 야기했다. 그리고 이런 문제들은 결국 그녀를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는 결국 담을 넘어 울타리 밖으로 탈출하는 것이었다. 이런 결과를 초래한 것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었다.
이러한 결과는 내가 추구한 사랑과 낭만이 아니었다. 내가 추구한 사랑과 낭만이 이런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나는 나의 문제를 인정하고 그날로부터 '사랑'세포와 '낭만'세포를 분리했다. 낭만을 사랑을 위한 수단과 목적으로 생각하지 않기 위해 내린 결정이었다. 그런데 사랑과 낭만을 분리하게 되니 뜻밖에도 원형으로 묶여있던 울타리를 자를 수 있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울타리와 나의 울타리를 더 큰 원형으로 이어 붙일 수 있었다.
그동안 울타리를 경계로 서있었던 서로가 처음으로 한 공간 안에 같이 있게 되었다. 한 공간 안에 같이 있다 보니 더 많이 부딪히고 싸우며 서로 상처를 입혔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떠나기도 했었다. 그러나 누군가 떠난 공간만큼 나의 울타리는 더 커져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와 사랑했을 땐 더 넓은 공간을 가득히 채울 사랑을 서로 나눌 수 있었다. 같은 공간에서 사랑을 함께 나누며 현실적인 문제도 함께 해결해 나가고 꿈도 함께 꾸다 보니 분리되어 있었던 '낭만'세포가 돌아왔다. 낭만세포는 우리의 울타리를 더 크고 더 견고하게 만들고 있었다. 사랑세포는 낭만세포에게 어떻게 해서 돌아올 수 있었는지 물었다. 낭만세포는 '원래 낭만은 달콤한 로맨스가 전부는 아니야, 실패와 고통도 동반해. 단지 그것을 몰랐을 뿐. 이제는 사랑을 하면서 서로 실패와 아픔을 이해하고 나눌 수 있게 되니 자연스럽게 내가 돌아올 수 있었어. 낭만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거야!'라고 답했다.
현실적인 문제와 그로 인한 고통 속에서 철저히 낭만을 배제했었던 나 자신을 반성했었다. 내가 좋아하는 만화 속 주인공들처럼 매번 승리하며 낭만을 실현시키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실패와 아픔 그리고 시련이 있었음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항상 현실적인 문제는 뒤로하고 이상에 집착했으며 실패를 두려워해 정작 현실에 맞서 싸울 용기는 없는 채 가짜 낭만을 추구했었다. 낭만을 가장 우선시하기 위해 사랑했던 사람을 나의 울타리에 가뒀으면서도 정작 모순적이게 나는 진정한 낭만으로부터 도망쳤었다. 위선적이며 거짓된 이기적인 낭만이었다. 거짓된 낭만, 그것은 현실에서의 도피 인 셈인 것이었다. 달콤하고 로맨틱한 낭만의 유혹이 나를 현실에서 눈을 멀게 했다. 그리고 그것만이 낭만의 전부라고 착각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진정한 낭만은 달콤한 로맨스가 전부가 아닌 실패와 고통도 낭만이었다. 진정한 낭만은 현실과 맞서 싸움으로서 얻는 실패와 고통 그리고 성취를 포함한 모든 일련의 과정임을 깨달았다. 가끔은 낭만을 포기하고 현실에 굴복할 수도 있다. 그러나 처음부터 싸우지 않고 현실을 도피하며 이상에 집착하는 것이 낭만이 아니었다. 현실과 맞서 싸우다 다치고 그로 인해 찢어지는 고통 때문에 현실에 굴복했을지라도 그건 낭만을 저버린 것이 아니었다. 실패도 고통도 낭만이니까 이기고 지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가끔은 현실적으로, 가끔은 낭만적으로 슬기롭게 낭만을 간직하면서 살 수 있다면 그것이 낭만파 인생이 아니겠는가.
달콤한 낭만에만 취해 실패가 두려워 현실을 도피하는 뜬 구름 잡는 이상에만 몰두한 겁쟁이 낭만파는 더 이상 없었다. 질 땐 지더라도 현실을 피하지 않고 싶었다. 실패를 마주하며 실패마저 사랑하고 끌어안고 싶었다. 낭만의 달콤함과 고통 모두를 끝까지 간직하고 기억하는, 현실과 이상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 슬기로운 낭만파가 되고자 했다. 그래서 나는 현실과 낭만 사이에서 더 유연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마치 넓어진 나의 마음속 울타리처럼.
누군가는 나를 기회주의적이며 거짓된 낭만파라 폄하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잊지 말자. 현실이 없으면 낭만도 없다. 실패와 고통이 없으면 성공도 사랑도 없다. 낭만적인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타인의 고통도 나의 고통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 가끔은 아프고 고통스러워 낭만을 포기하고 현실을 선택하더라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으면 한다. 그러한 선택 모두 거시적 낭만의 관점에서 보면 모두 낭만적인 선택이니까. 그리고 그러한 현실적 선택도 언젠가 낭만으로 돌아올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다. 그러기 위해선 현실에 몰두하더라도 마음속 깊은 곳엔 낭만이 주는 뜨거움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그럴 수 있다면 내가 정의한 낭만의 참 뜻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낭만은 로맨스가 전부는 아니야, 실패와 고통도 낭만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