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낭만은 로맨스가 전부는 아니야, 실패와 고통도 낭만이지
수전 손택 작가의 '타인의 고통'이란 책에서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이렇게 표현한다.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영역. 우리가 타인으로 하여금 연민을 느낄 때 그 감정은 일종의 소비라 표현한다. 왜냐하면 수동적 연민에 불과하기 때문이라고 작가는 지적한다. 예를 들면 우리는 제3 세계의 어려운 상황에 처한 이들을 가끔 미디어로 볼 때가 있다. 그런 내용을 보고 있으면 사람들은 각자 다양한 감정과 생각을 갖는다. 누군가는 연민의 감정을, 누군가는 인간으로서 당연히 느끼게 되는 감정의 동요마저 피로를 느껴 애써 무시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결론은 행동으로 연민을 표현하는 사람은 매우 극히 드물다는 것이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연민이라는 감정으로 단지 소비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인정한다. 그러나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예시가 너무 먼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이상과 현실을 구분 지어 행동하기 때문에 모든 이에게 적극적 연민의 손을 건네는 것은 아니다. 수전 손택도 그런 개인의 선택을 비난하려 했던 의도는 아니었다. 인간이라면 현실적인 선택을 하는 것 또한 당연한 이치라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생각했다. 타인은 아니더라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다를 것이라고.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은 나의 적극적 연민으로 고통을 나누고 해결해 나갈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신은 나의 이러한 결심을 비웃듯 사랑하는 사람이 고통에 시달리게 만들었다. 우울증, 내 생에 겪어보지 못한 전혀 다른 차원의 고통이었다. 마치 나의 오만함을 시험하고 싶었던 것인지 사랑하는 이의 고통이 내게 전달되었다. 그러나 견딜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고통을 전부 안아보기로 결심했다.
역시 내가 오만했던 걸까? 일단 고통은 나누는 개념이 아니었다. 전염병처럼 옮겨갈 뿐 그녀의 고통은 여전했다. 나에게 전염될 고통의 양을 선택 가능할 뿐이었다. 신은 내게 말했다. '사랑하는 사람이면 타인이 아닌 것이냐? 사랑하는 사람도 똑같이 타인인 것이다'. 애초에 타인의 고통을 전부 이해하는 것 자체가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오만과 이기심의 영역이었다. 그리고 그제야 사랑하는 이의 삶은 나와 다른 세계의 삶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마치 우리가 제3 세계의 고통받는 이를 보는 것처럼.
결국 나는 모든 고통을 감내하지 못해 짐을 내려놓기로 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이해했다. 내가 짐을 내려놓는다 해서 그녀의 고통이 더해지는 것도 덜해지는 것도 아니니까. 그렇게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타인이었다. 하지만 신은 나에게 이러한 인생의 모순 속에 사랑을 지켜내며 살 수 있는 힌트를 하나 주었다. 사람과 사람이 진정한 의미로 하나 되어 같은 세계의 삶을 산다면 그때는 정말 고통을 나눌 수 있다고 말이다. 전적으로 공감한다. 단지 그 대상이 이미 지나간 그 사람이 아니었기에 고통스러울 뿐이었다.
신이 내게 주신 힌트 덕분에 새로운 사랑에 대해서도 고통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을 수 있었다. 물론 다 이해할 수 없고 고통을 나눌 수 없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작은 날개 짓이 사랑하는 사람과 내가 같은 세계를 날 수 있는 소중한 도약이 될 수 있음을 오늘도 난 믿고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