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lack Cat Oct 09. 2021

내가 견딜 수 있는 "나"를 만들어가는 과정

내가 꾸며낸 가식적인 자아로서의 나와 진짜 안정적 자아 사이 균형점 찾기

무엇보다 인생은 성공보다 사소한 실패들을 많이 겪음으로써 인간관계 속 미묘한 균열의 지점을 포착해나가고 자아 중심의 세계를 벗어나 보다 상대방에게 열려있는 개방된 자신으로서의 영역을 키워나가고 그 통로들을 많이 확장시켜나가는 것의 연속이다. 세상에 태어나 부모님 품 속에서 마냥 무조건적인 사랑과 이해만을 받던 1차적 성장단계를 넘어서서 인간은 관계라는 이름으로 사회의 장벽에 부딪히게 되면서 수많은 타인들과 집단들 사이에서 모난 자신을 끝없이 비추어보고 관계라는 이름으로 물리적 타격을 입으며 살아가게 된다. 생각보다 많은 아픔들은 관계의 망을 통해서 생겨난다. 여기서 관계라고 한다면 나라는 주체와 거리를 둔 대상으로서의 타자로 상정된 그들 혹은 그것들과 맺어진 연결고리의 복잡성에 대해서 이야기해볼 수도 있겠지만 사실 가장 중요한 관계는 그 자신의 대외적인 명분으로서의 자아도 이질성이라는 특성에서 타자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관계라는 것은 서로 다른 세계에 놓여있는 객체들과의 부딪힘을 말하며 그렇기에 만남이라는 것은 커다란 낯선 세계가 다가오는 것을 뜻한다. 나라는 존재도 사실 진짜 내면에서 고유성으로 정의될 수 있으며 대체불가능한 진정한 내면 깊숙한 자리 속 자아가 있다면 그런 내면의 자아가 웅크리고 있을 때 바깥 세계에 부딪히면서 자신이 몰랐던 세계를 맞닥뜨리고 한꺼풀씩 베일을 벗겨가듯 새롭게 창조되고 있는, 현재진행형의 변화 상태에 놓여있는 자아가 있기도 한 것이다. 내면 깊숙한 자아는 꿈틀거리며 자신의 숨겨둔 목소리들을 세상과의 관계와 마찰에 의해 내비치게 되는 것이다. 스스로 자신이 제대로 알아오지 못하고 방황했던 외면적 자아의 틀을 점차 깊은 내면의 자아와 일치시켜나가는 것이 자신을 관계 속에서 좀더 편하게 만들어가는 방법이기도 하다. 세상과 마주하며 계속 가치관을 변화시켜나가고 정립의 단계를 원하면서 다듬어지는 외면적 자아와는 달리 내면 깊숙이 존재하는 근원적 자아는 사실상 그 사람의 본연의 민낯, 그 사람의 고유 정체성이라는 이름으로 거의 변하지 않은 채 남아있게 되는 것이다.

삶이란, 살아간다는 것은, 내면의 자아가 꿈틀거리며 소리를 내는 욕망들에 반응하며 외면적 자아로서의 페르소나를 가꾸고 내면과 외면의 괴리의 격차를 줄여나가면서 나를 나답게 할 수 있음에 끝없이 반응하는 물리적 정신적 행위의 양상인 것이다. 엄연히 말해서 외면적으로 내가 어떤 직함을 달고 살아가는가 어떤 이미지로 비추어지며 살아가는가는 내면의 자아가 내 자신이 어떤 형태의 자신으로 세상 앞에 서서 자리매김하기를 원하는지 목소리를 반영해서 끝없이 각색하고 변모시켜나가면서 다듬게 된다.

세상과 내면의 자아와 관계의 조각들을 통해 주어진 일종의 단서들을 통해 자신을 깎아나가게 되는 것이 삶이라는 형상과 한 사람의 이야기로 투영되어 나타나지는 것이다. 그래서 삶은 카뮈의 말대로 내면과 외면의 수많은 괴리들을 겪어가면서 조정과 타협끝에 내가 최선의 방식으로 살아가기 위한 능력의 형태로 나타난 일종의 연극이고 역할놀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받아들일 수 없는 배역은 내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듯이 각본도 연출도 오로지 내가 하늘이란 조명 아래 어떻게든 만들어가야 하는 연극이다. 실존의 상태로 내던져진 나는 태양열의 조명 아래 자유의지가 있는 인간이면서 동시에 내면의 자아와 외면의 페르소나가 끝없이 상충하며 최선의 선택 아니면 차선의 선택을 끝없이 해나가야 하는 그 의지의 소산으로서의 인생 대본 아래 계속 몸짓을 해나가야 한다. 한치의 앞도 미리 적힌 것이 없는 백지상태의 실존의 두려움을 견뎌야 하는, 미래라는 쪽대본의 주체로서 작가 자신이기도 한 것이다.

사람이 우울증에 걸리고 참을 수 없는 내적 분열을 겪는 까닭은 자신에 대한 역할 기대가 큰 만큼 내적 욕망의 목소리는 가득 부풀어 올랐는데 외면의 실행력이 그에 못따라준다고 생각하게 되면서 서서히 붕괴되고 말기 때문이다. 그리고 삶의 한없는 역할놀이의 실패와 예상치 못한 상황 속 최악을 모면하기 위해서만 외면의 자아를 내세우기 바쁜 나는 어쩌면 가장 최선의 방법으로 내면의 근원적 목소리를 끌어낮출 수밖에 없는 경우들이 있게 된다. 그렇다면 본연의 순수한 욕망이 좌절되었기에 나 자신의 전체적인 세계 그 모든 것이 흔들리며 균열 가운데 현실에 나의 내면의 자아를 맞추게 되고 다시 현실이란 차가운 절벽에 시선을 맞추어 상상과 희망의 영역을 제한하게 되는 것이다. 그 근원적 자아가 철렁 바닥 끝까지 끌어당겨지는 듯한 기분은 실제로 세상에 의해 좌절되었을 때 자신이 그에 순응하기로 마음을 먹게 된 경우 더더욱 그렇게 굳어지게 되면서 침체된 상태로 무기력한 자신의 상태를 방관하게 되어버린다. 무기력한 상태의 실패의 나락이 편안하게 느껴지거나 한탄과 비애 속에서 자신을 처량한 비극의 주인공으로 역으로 우상화시키지 않으면 그 슬픔과 나의 무대를 잃어버릴 것 같기 때문에 슬픔과 절망의 고독을 겪고 침체되어 있는 우울증적 상태는 어느정도 나르시스트적인 면모를 가지게 된다. 그런 우울증을 겪을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자신이 무대에서 밀려나게 되는 기분에서 자신을 구해주는 것이 역설적으로 그 슬픔에 더 젖어있도록 놔두는 것이다. 슬픔의 지독함에 몸부림치다보면 자신이 그 쓸쓸한 무대 속 주인공으로 되돌아와 역경을 딛고 새롭게 아픔을 숭고한 표적으로 간직한 채 나아갈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된다. 그렇게 나는 슬픔을 만끽하고 그 속에서 진저리를 한 번 치고 나락에 치달아보고 나서야 내가 좀더 특별하게 중심을 잡는다는 느낌으로 삶의 중심에 차차 다시 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내가 싫어하고 견딜 수 없이 못난 것 같은 나 자신의 외면적 형상을 받아줄 수 있기 위해 내 진정한 내면의 자아가 지각변동을 겪고 가치관이라는 좀더 단단한 무언가로 무장을 하게 된 이후에야 중심 추를 잡고 삶의 주인공으로서 패를 다시 쥘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비뚤어진 내면과 외면의 균형이 내면의 재정립과 재형성화를 통해 타협점을 맞추게 되고 균열을 최소화시키고 그 자체를 받아들일 수 있으면서 우울증의 잔여물을 미화시켜가며 나를 좀더 특별하게 만들도록 노력할 수 있게 된다. 비로소 나는, 견딜 수 없는 나를 지나쳐서 굳건한 나의 모습으로 중심을 잡고 조금 비뚤어졌으면서도 절뚝거리는 나를 보듬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태연하게 매일 찾아오는 아침과 밤을 맞이하며 변해가는 나에 맞춰 삶을 살아가면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