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Black Cat
Oct 09. 2021
나를 정의해주는 틀을 확실하게 하기
나를 옭아매고 있는 그것들을 보며 새로운 프레임 씌우기
나는 오랜시간 경계선 인격장애, 다른 말로는 정서불안증이 있어왔다고 판정을 받게 되었다. 우울과 불안이 극한의 상태에 다다라서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없고 몸을 자꾸 흔들거려야만 한다거나 상황이 더 심각해질 때는 대중교통을 제대로 이용하기 힘든 수준에 미치게 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아픈 것도 너무 당연하다는듯이 참고 스스로 제대로 몸과 마음을 아낄 줄 모르는 상태에 놓여있게 되었는지라 수없이 흔들리는 나 자신이 벼랑 끝에 서있는데도 내가 그저 종잇자락처럼 나부끼게 내팽겨치고 있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그저 식욕도 성욕도 없는 상태로 내가 나를 위해 어떤 그럴듯한 대접을 장만하거나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을 누리기에는 모두 부질없고 나에게 특히 사치스러운 것들이라고 생각하기까지 했다.
나는 자랐을 때 나 이전에 섬약한 신경을 갖고 감정조절을 제대로 하는 것에 어려움이 있는 어머님 밑에서 자랐기도 했고 그런 어머니가 인생에서 타오르는 불안과 자기 욕망 및 분노에 겨워 견딜 수 없어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그저 나만의 사고에 갇혀서 어머니라는 커다란 아픔의 대상이 나에게 주는 상처만을 한없이 크게 생각하곤 했다. 그런 정신병은 어머니의 불안정한 정서에서 이어받아 나에게 고스란히 이어졌고 심각하게 정서불안에 시달리고 나 역시 타인을 대하는 것에 있어 지나치게 좁은 시야만을 가지고 쉽게 상처를 받는 지극히 연약한 사람으로 성장할 수밖에 없었다. 모임 속에서 항상 외톨이였고 외모를 감추기에 바빴으며 이 세상이 나만 숨겨놓으면 모든 것이 안정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만 같은 상당히 커다란 피해의식과 패배의식을 떠안고 세상과 직접 접촉하기 두려워한 채 공기의 스침에도 파르르 떠는 그런 겁쟁이 어른으로 20대의 한참의 나이를 보냈던 것같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어머니를 치유해드리고 어머니에게 좋은 딸이 되기 위해 무작정 어머니 곁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부터 어쩔 수 없이 가슴 아프게도 접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이혼하고 헤어져 사는 아버지 편을 들어 살기로 선택한 것이 어머니에게 있어 커다란 불효를 저지르는 것처럼 나에게 대하기는 했지만 어머니에게 있어서도 나에게 있어서도 애정이라는 동전의 양면 같은 가시넝쿨 같은 연결끈으로 상대를 더 할퀴고 서로에 대한 집착과 지배욕만을 부르는 잘못된 관계를 청산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어머니는 당신의 삶에서 느끼는 결핍과 갈증들을 나를 통해 실현시키고 싶어하셨고 당신이 생각하시는 대로 내가 감정을 굳히고 로봇처럼 실행에 임해주기를 원하는 것 같았다. 당신의 삶에 아쉬움이 남는 만큼 내가 대신 부응해주어야만 하고 어머니의 심리적 동반자가 되어주는 것을 원하는 명분으로 내가 당신의 부정적 감정들의 배설구가 되어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연인 관계든 가족 관계든 그것이 한때 애틋하고 아름다웠을지 모르겠지만 그것이 설령 천륜이라고 할지라도 마냥 인간적으로 특정한 그 이상의 것들을 무조건적으로 바라고 헌신을 한 댓가로 헌신을 해주기를 바라는 식으로 나아가 버리면 양쪽의 자유의지가 꺾인 채 인위적인 관계로 굳어져 삶의 중심이 거짓으로 도태되어버리고 마는 일이 생긴다.
세상을 살면서 태어나면서부터 나 자신의 성찰 없이 자연스럽게 몸이 이끌려서 혹은 가족이라는 이유로 반드시 그 해당 관계를 억지로 지속해나가며 강제로 억지 의무를 다해주고 있는 것에 있어서 내가 어떤 식으로 관여했는지를 잘 생각해보는 것이 중요하다. 사람 인연이 맺어지는 것은 물흐르듯이 시작되면서 결국 나의 마음을 진단했을 때 내 마음이 밀어내고 있지 못하고 관계를 이끌고 가야할 필연의 이유가 나다움을 넘어서 강할 수 없다면 그것은 정리해나가는 것이 맞는 것이다. 그런 독립을 함에 있어서 내가 초라한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에 지치고 강제로 특정 집단에 거의 구속되어있다시피해서 벗어나기 어렵다고 할지라도 처음 관계를 끊음에 있어서 따르는 부산물들을 처리해나가는 자신이 대단한 인생의 한 단계를 거치고 있는 것이라는 자긍심을 갖고 앞을 헤쳐나가야 할 것이다.
그런 관계 맺음과 끊음 자체도 어마어마한 노력이고 벗어남 자체가 자신이 허물을 벗는 것처럼 새롭게 세계의 한 부분을 떼어내고 보는 시선을 제한시키며 보다 구체화된 나를 만들어나간다. 어떤 것을 좋아하고 싫어함에 대해서 사람들은 관계의 특징과 유형 속에서 제대로 규정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애매모호한 관계들을 거쳐나가고 겪어나갈수록 나는 반대급부로 어떤 관계들을 못견뎌하는지 명확해지게 되므로 관계에 있어서는 그 반대급부로서의 거울의 역할이 되어주는 반사 기능으로서의 경험들이 필요한 것이다. 경험을 어느 정도 깊이 여러 번 거쳐본 사람이라면 발을 들이는 순간 이것은 아닌 것 같다는 직관적인 예감의 센서가 내면에 장착되기 마련이다. 그런 센서가 발달한 사람일수록 내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인지 구조가 보다 명료하게 되어있는 사람이다.
나의 내면의 세계를 대하는데 있어 보다 닥치는 상황에 따라 유동적으로 세련되게 대처하지 못하는 사람은 새로움을 시작하는 것에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게 된다. 실행력에 있어 마비가 생기고 공포감에 닥치는 사람은 나의 인지에 있어 감수성과 사고의 관절이 유연하지 못한 사람인 것이다. 대상을 대하는 것이 불편한 이유는 그것에 대한 인지적 트라우마가 있거나 그것을 바라보는 나의 존재가 자연스럽게 세계 내에서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속성의 것임에 선행된 진단이 있지 못하였기 때문이 크다. 그렇기 때문에 상처를 주었던 사람이나 사건들에 대해서 올바르게 인지하기 위해서 세상과의 양방의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나와서 그것 자체만으로 탐구대상에 두고 그것이 세상에서 객관적으로 어떻게 인식되고 있는지를 먼저 파악한 다음에 더 중요하게는 나에게는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를 정의하는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재산이 중요하다면 객관적으로 그것이 결혼에 있어서 중요한 하나의 변수이기도 하지만 그 사람과의 관계를 두고 더 여실히 드러나는 것은 반대로 내가 그 사람을 필요하다고 느끼는 진짜 깊은 이유가 무엇인지, 재산이라고 생각해서 그 사람을 선택하는지 아니면 그 보다 명예라고 생각해서 재산은 덜하지만 명예나 다른 무언가가 높은 상대를 선택하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 대상에 대해 거리를 두고 나에게 얼만큼의 무게감으로 작용하는지를 상대를 두고 판단함을 통해 나는 어떤 사람인지가 잘 나타나게 된다. 그렇게 때문에 관계의 경험에서 옵션들이 많았던 사람일 수록 자신을 다양한 저울질 속에 놓아보게 되므로 보다 솔직한 내면의 자아의 목소리에 맞추어 그에 따른 세세한 움직임과 표정으로 일관된 편안한 선택과 판단의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만큼 다양한 선택들 가운데 불안해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나의 촉이 그 쪽을 보다 더 크게 생각하고 확신하고 있다는 센서를 굳힐 수 있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나의 세계는 나를 둘러싼 그것들을 끊임없이 새롭게 정의해나가고 세부적인 특징들과 규정들로 나의 입지를 보다 투명에서 또렷함으로 만들어나가고 색칠을 입혀나가게 되는 과정인 것이다. 그 어떤 선택의 기로에 서서도 양극단의 선택지 가운데 계속 흔들리는 것이 아닌 보다 강단 있는 확실성으로 앞으로 밀고 나가야한다. 관계 속의 이면을 더 깊게 바라보면서 실수를 끝없이 줄여나가는 그 과정을 바로 성숙해가기 위한 맺고 끊음의 단계이자 사고 유연화의 과정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