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착하기만 할 수 있는 사람 어디 나와봐
불교 용어에 "무주상보시"라는 말이 있다. 상대에게 베풀기로 했으면 그 어떤 댓가도 바라지 않고 순수하게 마음 그대로 바칠 수 있는 순수한 선의를 두고 하는 말이다. 상대방을 진심으로 배려하여 그 사람이 행복하고 좋은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기를 기원하며 무언가를 베풀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자체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 마음이 어쩌면 상대를 좋아하는 마음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상대에게 착할 수 있는 것은 상당한 노동력이 들어가고 마음으로나 몸으로나 때로는 물질적으로나 어떤 면에 있어서건 나 자신의 한측면을 기꺼이 바칠 수 있다는 것이며 그것은 상당히 소모적인 행동이 아닐 수가 없다. 내가 아무리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내가 극진한 진심을 다한 노력이 아무 소용없는 것으로 밝혀지고 싶지 않을 것이고 사람은 분명 최소한의 인정으로라도 내가 베푼 착한 행동에 대한 대가를 어떤 마음이든 받고 싶어한다. 한 사람의 일방적인 최선으로 관계가 불균형하게 유지된다면 한쪽의 배려 내지는 희생이 너무 당연시여겨지는 방향으로 길들여지게 되고 결국 그 착한 행동은 착한 사람을 착한 사람이 아니라 쉽게 퍼다쓸 수 있고 아무렇게나 굴어도 괜찮은, 즉 최소한의 배려로의 성의를 꼭 답하는 것조차 굳이 필요없다는 식으로 인식되는 사람이 되고만다. 나는 그저 서로 따뜻한 정이 오가는 훈훈한 관계로 유지되기 위한 사회생활의 일환으로 최선을 다했을 뿐인데 나는 어느새 상대에게 다 퍼다주면서 내 안에 되돌려받는 것은 없이 나만 고갈시켜가고 도리어 필요한 최소한의 관심조차 받지 못해 외롭고 빈곤한 상태로 남겨지게 된다. 이렇게 일명 "호구"로 남겨진 "나"는 사회적 관계 속 중심을 잡지 못하고 언제 진짜 착하고 어떻게 진짜 착할 수 있는 것인지 방법을 제대로 습득하지 못해 우왕좌왕하게 되면서 진정한 자아를 잃어버리게 된다. 나 자신을 더 잘 알 수 있기 위해서는 거울이 되어주면서 긍정적 발전의 의미로서의 비교와 반사의 대상이 될 수 있는 타자의 존재들이 필요하고 그를 통해 내 자신의 적정한 위치와 안정된 페이스를 찾아나가게 되는 것인데 그런 사회적 관계 형성의 기초가 제대로 되지 못하는 것이다. 단지 형식적 의미로서의 사회적 관계의 필요성만 마음이 아닌 머리로 단순히 인지하다보니까 문제가 생기고 만다. 마음이 맞는 누군가를 선택하고 그에 맞는 배려를 베풀고 상대와 안정된 관계 속에서 진짜 착한 사람이 될 가치를 진심으로 느끼게 되고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는 것이며 착한 행동도 역시 소모적인 행위라고 했을 때 그 소모성의 행위가 노동력의 값어치로 확인받게 되는 것이다. 그냥 수많은 사람들에게 무조건적으로 일방적으로 착함을 전시하고 다니는 것은 말 그대로 접근하기 쉬우면서 이용하기 쉬운 사람으로 자칫 오인받을 수 있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기 때문이다. 친절하고 매너좋은 사람, 그런 분위기가 풍기는 사람은 좋지만 알고 봤더니 속 없이 다 여기저기 베풀고 다니는 그런 류의 착한 사람으로 비추어지는 것은 도리어 자신을 위해서라도 좋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게 아무나에게 착하기만 한 사람은 단단한 관계의 매듭이 삶 속에 자리잡히지 않은 경우가 많아서 자신이 지나친 방목의 상태에 놓여있어서 중심 없이 여기저기 일시적인 정서적 위안을 위한 거처로서 옅은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도 있다. 그 사람에게는 마음 속에 진실된 관계를 꿈꾸었고 그 관계를 위한 맹목적인 착함을 전시하여 착한 사람으로 당하고만 살다가 상처를 받고 진저리친 나머지 "어차피 이 험하고 지긋지긋한 세상에서 진실된 만남 같은 것은 사실 없어"라고 생각하는 경우로서 착한 사람되면서 관계 맺는 것에 상처를 많이 받은 사람이기도 하다. 잠시 붙은 사람에게 하룻밤의 뜨거운 육체적 관계만을 선사하고 바로 뒤돌아버린다거나 자신에게 잘 시작해보려고 다가오는 사람인데도 "너도 어차피 그동안의 그 인간들처럼 내가 잘해줘봤자 날 버리고 도망가버리겠지"하는 마음으로 방관하고 도망쳐버리는 경우이다. 그런 반항기 어린 상태로 가시를 곤두세우는 사람들은 충분히 사랑받는 기분을 확인받지 못하면서 자랐을 가능성도 크고 사람들을 사실 상당히 두려워하는 마음에 은둔형 외톨이로 자신을 방치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분명히 내가 사랑하는 사람, 부모나 친구에게 사랑하는 표현을 다하고 착한 태도로 그 사람이 만족할 수 있기 위해 최선을 다했는데 나의 착한 행동이 싸늘한 무관심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솔직히 배신당한 것만 같은 기분마저 들고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자괴감마저 들게 된다. 잠깐잠깐의 관계들은 어쩔 수 없이 맺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맺지만 자신이 그 관계의 부담과 트라우마의 재생되는 공포를 견디지 못하여 진실된 관계의 시작을 하지 못한다. 적당한 밀고 당기기를 하지 못하고 밀어내기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애처로운 마음으로 자신이 마치 고해성사를 다 들어줄 수 있는 신부님처럼 종교적인 마음처럼 무한히 착하고 넓은 자신을 전시하며 자신에게 못되게 구는 사람들과의 관계도 제대로 처단하지 못하는, 그 못된 사람들마저도 자신이 다 품어줘야할 것처럼 구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다. 소위 말해 "나쁜 남자"를 나만이 보듬어줄 수 있고 그를 만족시켜줄 수 있기에 그의 애수에 젖은 사나운 눈빛을 성스러운 여인의 마음으로 끌어안아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상한 환상이다. 자신을 못살게 구는 관계들마저도 자신이 계속 타박을 받는데도 끌어안아주고 계속 화수분처럼 퍼다 주는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사람의 마음 속에는 사실상 그렇게 걸레짝이 되어가는 자신의 빈곤한 형편이 종교적인 성스러움과도 같다고 상당히 미화시키는 마음이 분명히 혼재한다. 그 사람이 신앙인이든지 아닌지와는 상관없이 그렇게 숭고하게 승격시킨 자신의 믿음은 그 자신의 세계 안에서 창조된 유일무이한 종교의 성배와도 같은 것이다. 그런 종교에서나 통하는 무조건적인 착함의 기준은 현실로 끌어내려오면 사실상 자기기만의 최고정점과 자기만족, 혹은 다른 방면으로 연속되었던 관계들의 실패에서 이어지게 된 정신승리의 주술과도 같은 도피 방법일 수도 있을 것이다.
베푸는 행위는 분명히 좋은 것이다. 다만 아무런 조건 없이 상대에게 정말 "무주상보시"의 마음으로 베풀 수 있다면 더더욱 정말 좋은 것이고 그런 사람들이 희망을 주기 때문에 이 세상이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진짜 일반적인 관계에서 착한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상대에게 모든 것을 최대한 줄 수 있는대로 다 주는 것이라기보다 무엇보다 어떤 수단을 통하든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주면서 관계의 평형점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호혜적인 관계가 진짜 건강한 착한 사람이 되는 방법일 것이다. 내가 나를 지키면서 적당한 선을 지키고 우아하고 예의 바른 사람의 이미지를 풍기게 된다. 하지만 착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자연스럽게 무리하지 않고 적당히 오가는 교감 속에서 상대를 위한 마음을 점점 키워가는 것을 말한다. 무조건상 강박에 의해서 상대에게 나를 쉽게 내려놓는 착함 코스프레의 행동 밑에는 사실상 조건상 내가 이렇게 서두르며 나를 내려놓은 만큼 너도 미안한 마음을 가져서라도 나를 떠나지 않고 그만큼 너를 똑같이 내려놓을 수 있으면 좋겠어, 내가 준 만큼 당장 너의 것도 그만큼 보여줘서 너가 나를 떠나지 않을 관계의 사람이라는 것을 입증해보여줘, 라는 신호로 보이는 것이다. 마음이 끌리지 않는데도 쉽게 성관계 요구에 응하는 사람들의 내면에도 내가 이렇게 하면 너도 나를 마음에 들어하고 사랑을 더욱 듬뿍 표현해주겠지, 라는 기대심리처럼 말이다. 항상 나의 욕망이 무엇인지, 내가 관계에서 나의 욕망을 투영하여 나를 기만하고 있지는 않은지 항상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아무 조건 없이 착한 사람이기만 하고 싶다는 것은 사실상 일반적인 수많은 이해관계와 마음이 얽힌 관계에서 실천하기에 쉽지 않은 과제일 것이다. 진짜 착한 사람이기 위해서는 내가 나에게 먼저 솔직해지고 나 혼자만으로 관계를 벗어나 나 스스로 생각하기에 충분히 매력적이고 단단한 사람일 수 있어야할 것이다. 그래야 나를 지켜가면서 진짜 나에게 맞는 사람, 나에게 쉽게 상처주지 않을 사람을 선별할 수 있는 눈을 자연스럽게 키워나갈 수 있으면서 진짜 착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