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 탄력성과 상처를 품어안을 수 있는 넉넉한 가슴을 키워가기
예민하다는 것은 선천적인 기질상으로 남들보다 더 섬세하고 감수성이 높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내적으로 쌓인 수치심과 상처가 많기 때문에 대상을 인지하는 것에 있어서 항상 무슨 말이나 자극이 들어오더라도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자신을 질식시키고 있는 수치심을 통해 즉각적으로 먼저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더 많이 까진 살에는 더 촉각도 예민하고 작은 것에도 많이 아프듯이 마음도 예민함에 지쳐 자의식 과잉으로 자신보다 상처가 더 커지게 되면 그 상처를 실제보다 더크게 인식하고 그 상처를 통해 닿는 부위는 실제 물리적인 타격 그 자체보다 크게 느껴지게 된다. 살결에 닿는 자극에 유독 극성맞게 반응하고 세상이 다 공격적으로만 느껴지다보면서 자존심이 허물어지는 일은 대다수인데다가 자존감은 바닥을 치게 되다보니 심지어 작은 배려로 다가오는 손길조차도 뿌리치게 되고 그것 역시 나를 공격하려고 하는 것처럼 느끼게 된다. 그럴 때는 일단 모든 것들로부터 도망쳐나와서 완전히 철저하게 혼자가 된 다음 나를 가장 아프게 하는 그 근원이 과연 무엇인지 깊은 상념을 통해 까만 동굴 속을 더듬더듬 거리는 것이 필요하다. 복잡하게 엉켜있고 내 안 깊숙이 감추어져 나오지 않는 것만 같지만 사실 생각보다 명료한 이유인데 내가 너무 강력하게 외면하고 싶은 욕구가 강해서 차마 쳐다보지 못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 어머니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강했으나 나의 성향이 어머니가 원하는 쪽과 달라서 자꾸만 어긋날 수밖에 없었던 유년시절, 극도로 더욱 감수성이 예민했던 나는 그렇다고 함부로 마음대로 엇나갈 수 있을만큼 대범한 것도 아니었고 대인관계에 있어서도 늘 상대방이 나의 외모를 보면서 우습게 볼까봐 상대방 얼굴조차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할 정도로 위축되어 있었다. 그렇게 어머니 곁을 떠나오면서 나의 새로운 미래를 시작할 수 있는 가능성들이 생겼지만 심리적으로 과거의 결핍은 강한 트라우마가 되어 불쑥불쑥 이전 상황과 상관 없는 상황에서 흥분하고 주체할 수 없는 슬픔에 맞닥뜨리는 곤경에 자주 빠져있게 되었다. 사실 나의 근원적 이유를 직면하는 것에 있어 내가 느끼는 수치감과 모멸감은 어마어마한 것이었고 어머니에게 인정받지 못한 자식이라는 낙인이 너무 큰 오명으로 나의 삶에 남아 나에게 생리적인 신경발작과 우울증 호르몬 분비 증대를 야기시키기까지 이르렀다. 다른 그 누가 나를 무시하고 자존감을 깎는 것에 있어서는 그러다보니 상대적으로 관대해지게 되었고, 괜찮아 이 정도 상처쯤은 내가 나에게 허락할 수 있어, 라는 식으로 나에게 가해지는 자기 학대들을 나는 무수히 많이 우울증 약과 함께 삼켜야만 했다. 약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은 분명히 좋은 면도 있었지만 나의 근원적인 두려움과 좌절감을 마주하고 화해하기까지는 않되더라도 내가 그것을 나의 살집의 분명한 일부로 받아들이기로 애쓰고 용납할 수 있기까지는 상당한 인내가 따랐다. 너무 큰 짐이 나를 짓누르고 있으니 상대적으로 가벼운 상처들에 대수로워지지 않게 되고 그렇게 자존감이 낮은 채 매력 없는 사람이 되어버리니까 소위 너무 쉬운 사람으로 전락해서 이리저리 채이고 나뒹굴어도 아무렇지 않아할 만큼 나는 나를 낮은 품질의 인간으로 대우하고 있었고 내가 생각해도 나는 전혀 매력이 없었다. 그런 나를 아끼지 않으니까 내 몸이 자연스럽게 아파오고 무기력증은 더해져서 살은 빠지는데 몸은 더 무거워지는 것 같고 쉽게 약해지는 증세를 보였다. 그렇게 근원적 상처를 외면한 채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아무리 좋은 책을 읽는다하고 약을 먹고 상담을 받는다한들 나의 태도는 일관되게 상처만 빼놓고 빈껍데기 나를 시험대 위에 올려놓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셈이 되었다.
나 혼자서 온전히 나의 상처와 시련을 깊게 목도하고 충분히 그 속에 파고들어 진저리칠 때까지 솔직하게 마주하며 끝장을 보고 나오는 편이 오히려 외면하는 편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연을 끊었던 어머니에 대해서 새롭게 생각을 해보며 점차 어머니라는 세계 속에서 그녀의 삶 내부에 불가피했던 그녀만의 상처와 그런 생각들의 이유에 대해서도 이해하고 나와 분별되는 점을 분명히 찾아 나와 어머니의 마찰이 어느정도 불가피했었음을 인정하고 어머니를 미워하는 것을 넘어 더 넓게 품을 수 있을 정도가 되었을 때 나는 나의 오랜시간 곪아버린 상처에 대해 좀더 유연하게 대처하며 나의 삶 위에 그녀의 한 자리를 새롭게 마련했다. 내가 지배되는 것이 아닌 내가 주도하여 어머니를 내 내면의 삶 안에 끌어들이고 그 지난 상처와 다른 내가 되기 위해 두세배로 더 열심히 세수를 한다거나 약을 더 열심히 챙겨먹고 일기를 더 열심히 쓴다거나 상대에게 사랑받으려고 억지로 노력하는 것이 아닌 자연스러운 품위로 배려가 흘러나오는 여유를 가지는 그런 사람이 되어가는 노력. 그것은 내 몸의 살을 새롭게 비집고 나의 영역을 더 넓어지고 섬세해지게 해주었으며 세상의 다양한 아픔들에 더 자세하고 진심으로 귀기울이고 같이 뜨거운 가슴으로 이해를 해주려고 차차 힘을 주어 나의 불안을 덜어가며 툭하면 세어나오는 한숨이 아닌, 건강한 숨으로 내 안을 채울 수 있는 것. 그것 자체가 나에게는 엄청난 용기였고 내가 조금 사랑할 수 있을만한 나의 모습으로 가꾸어가는 방식이었다. 세상에는 어머니라는 한 사람의 잣대가 아닌, 더 많은 사람들의 목소리와 잣대들, 가치들이 공존한다는 것을 어른이 되어가고 틀에 갇힌 교실을 벗어나 절실하게 먼저 온몸으로 감각하며 배워나가야할 것이다. 그렇게 내가 상처받아도 되는 내가 아닌, 그 어떤 상처도 나를 괴롭힐 수 없다는 인식으로 도약하여 내가 생각하는 상처란 내가 나에게 명령을 내리는 영역으로서 온전히 나의 인식이 그 주도권을 쥐고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하게 두는 것이다. 내가 상처에 대한 적당한 탄력성과 나의 정곡을 짓밟아도 굳어진 살로 적당하게 자연스럽게 우러나는 자신감으로 나와 내 주변의 세계에 대해 올바른 객관화를 통해 자기중심적 고정관념에서 깨어나올 수 있는 탈피의 사유를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지난 날들의 아픔들과 나의 정의를 새로이 하며 그 고정적이었던 유착 상태를 넘어서서 내가 상처를 줄 수 있는 대상들 사이의 역학 관계를 새롭게 굳히고 어떤 정서적 물리적 타격 없이도 나라는 세계 안에서 그 트라우마와 함께 조화롭게 공존하는 한 유기체 내의 자아로서 항상성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내가 나의 세계 속 주도권을 가지고 있는 자가 자신의 세계를 보다 넓게 조망하며 조화로운 한 의미의 자아로 나를 크게 깨우칠 수 있게 해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자 자신에게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인지 구조에 대한 비교적 명확한 인지와 통제가 유연한 자가 바로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가진 진정한 섹시한 삶을 살아내고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