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lack Cat Oct 09. 2021

기억의 마법을 통해 나의 상처를 나만의 이야기로 재편성

실존의 고독과 선택 속에 나부끼며 살아가는 나의 굳건한 선택을, 이해해줄

가만히 있어도 떠올리고 싶지 않은 나의 고통스런 기억의 일부가 불현듯 떠올라 나의 감각을 저 너머에서 지피워오를 때면 나의 감각이 마비되는 것 같고 그때 사건의 끔찍했던 찰나 속 숨막혔던 밀폐의 테두리 안에 가두어지는 기분이 든다. 가끔씩 내 삶의 평온함이 찾아들 때면 나의 반대급부로 조울증의 기복에 따라 올라간 기분을 억누르며 평온함을 굳이 박살내고 나를 불행의 기억을 복습하는 방향으로 나의 감각을 사로잡는 것이다. 원하지 않는 기억이 나를 끊임없이 옥죄며 보기 싫고 추한 나의 일부를 그냥 그대로 사랑하고 이해해주기에는 그 기억은 나의 순간순간을 깨고 쳐들어오고 나의 의미를 부정적인 의미로 되돌리고 굳어지게 하고만다. 삶은 자기반성과 일종의 자기 합리화로 자신을 지키기 위한 그럴듯한 나만의 위로로 나를 변장시키고 구색을 갖추어나가는 것으로도 때론 벅차다. 하지만 말그대로 절망 그 자체란, 실패 앞에 처절히 내가 깨져보는 감각을 내 안에 깊숙이 일종의 충격 요법처럼 심어준다. 그런 절망은 사람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고 수많은 의미들로 갈라져서 이해되곤 하지만 인간이 운명의 가혹한 힘에 맞서서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음 자체로서의 절대적 압력이라는게 있다. 섬세한 사람은 자기가 여러 방면으로 사유를 세분화시켜나간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에게 주어진 문제들을 보다 다양한 층위로 분별해낸 사유의 도식 안에 그 문제들을 보다 구체적이고 명확한 이미지와 정의로 형상화시켜나가면서 기억을 복잡하게 명징화해나간다. 섬세하다는 것은 그만큼 대상에 대한 애착이 강하다는 것이고 자기중심의 해석 체계 안으로 일관되게 맞추려고 하는 강박이 평균치보다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누구보다 자신이 자신의 세계 안에서 힘든 기억이나 상처가 모나게 덧나는 이유는 자신의 평탄한 삶의 기준에서 완벽주의적 성향에 맞추어 하나의 조화를 이루지 못한 채 균형이 어긋낫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만의 완벽함이란 기준에 맞추어 그냥 어긋난대로 엉성하게 납득되는 것을 허락하지 못하는 습성이 너무 강하다보니 흘러나오는 자신의 안정 기준에 대한 지나친 강박이다. 불온한 절망 그 자체를 내면의 일부로 수용할 수 있기 위해 그 절망에 대한 이해를 자기연민으로 먼저 보듬어 안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먼저 심리적인 이질감으로 인한 완강한 거부반응으로부터 자신을 일차적으로 지킬 수 있다. 그러면서 그 절망이 불쑥 찾아온 것이 아니라 그럴 만한 피치못할 나의 선택들이 있었다는 점을 분명히 인정하고 그런 잘못된 선택 속에서 나의 기존의 내면세계는 어떻게 그런 절망과 불화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잘 생각한다. 내가 나에게 맞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시작한 일이었지만 그 일은 분명히 부작용을 일으키면서 나의 정서에 부정적인 자극을 주었고 나의 적성은 사실상 이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었음을 깨달으며 그 실패한 결정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판단한다. 그리고 생각보다 내 마음의 완충제로서 필요한 정신 중 하나는 이 세상에는 "나의 힘으로 어쩌할 수 없는 것"의 영역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 불가능함의 속성 가운데서 나는 삶에 있어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미지의 속성과 어떻게 마주한다. 나의 선택들을 미세하게 조종하며 살아갈 것인지 생각하는 힘이 필요하다. 절망의 다른 이름은 결국 내가 알 수 없었던 것이기에 막을 수 없던 것이고 내가 부족하다는 것을 잘 몰랐기에, 내가 생각했던 내가 아니기 때문에, 생겨나는 그 어떤 것이기도 하다. 결국 내가 이전의 나로 돌아가더라도 이전의 나는 불행의 실체라던가 파급력 자체에 대해서도 감히 상상할 수 없을 한계의 영역에 봉착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어찌되었든 필연적으로 나에게 닥칠 수밖에 없던 하나의 사건 정도로 절망이라는 큰 표현을 가혹한 운명으로서의 한 흐름이었다고 큰 과거의 물결 속에 흘려보낼 수 있는 것이 필요하다. 내면의 세계에 갑작스런 큰 슬픔이 닥치게 되면 그 슬픔이 그 자리에 주변과 어느 정도 그럴듯한 하나의 풍경을 이루어나가고 점차 한 편의 추억 사진 속 잔해처럼 덩그러니 자리할 수 있도록 적당한 애상감으로 잘 보듬어서 떠안고 가는 것이 필요하다. 이제는 아무 표정 없이 바라볼 수 있는 옛 애인의 얼굴과 그가 준 상처들처럼. 내 안의 세계가 슬픔으로 인해 슬픔의 존재감이 내 존재 이상으로 크게 자리잡게 되면 정말 그 자체로 슬픔이 도리어 주변의 안정되어있던 질서들마저 붕괴시키고 흐트러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나라는 중심이 언제나 잘 잡혀 있고 나의 고유한 매력이 무엇인지 인지적으로 명확하게 서있을 때 나에게 닥치는 그 어떤 울음도 나는 천천히 더 넓은 나로 인해 다독이며 흘려보낼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점차 무디어지게 되고 나는 새로운 인생의 요소가 내 안에 들어올 때마다 나만의 섬세한 조직 체계들을 다듬어나가면서 나라는 사람을 조금씩 정교화된 나로 만들어나갈 수 있게 된다. 아픔이 있어본 사람일수록 더 주변 반응에 예민해지고 자기 검열의 수준이 높아지는 것도 자신을 지켜나가기 위한 수많은 변명들이 필요했던 밤을 지나 나를 지켜줄 보완으로서의 해결책을 서서히 내 안에 들이게 되는 것과 같다. 그렇게 내가 나를 괴롭히는 기억으로부터 점차 거리를 둘 수 있는 것도 아픔으로부터 방어할 수 있기 위한 내면의 방어 기제들을 첨예하게 다루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렇게 나를 지켜줄 방편들이 나라는 존재 속에 서로 존재감의 위력을 뽐내며 저마다의 위치에서 잘 작동할 때 비로소 나라는 존재 구성은 그 세계 자체가 하나의 큰 단단한 구성체로 작동한다. 그렇게 구성체 내로 퍼진 정신의 근육이 삐걱거리지 않고 부드럽게 유연하게 작동한다. 서서히 나를 괴롭히던 그림들, 나를 괴롭혔던 사람들, 그 이유가 무엇이었건 과연 그 상황 속에서 나는 다시 돌아간다면 어떻게 할 수 있었을까 생각해보게도 될 것이다.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상황 속에서 나를 용서할 수 있는 재연의 무대를 만들어보는 것은 다 부질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일종의 의미없는 유의미로서 그 자체로 역설적인 복습이 될 수 있다. 그렇게 나는 결국 과거의 소심하고 당하기만 하는 졸렬한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일 수 있었고, 과거의 나는 지금 알고있는 것을 미처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이해해주고 반복된 기억 학습 속에서 지쳐버렸으니 이제 그만 잠들게 다독여준다. 살다가 몇번은 악몽처럼 다시 깨어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끔찍했던 기억이 그 기억 속 당사자인 나와 그 어떤 대상에게 세상에는 절대성으로 느껴지는 절망의 영역이 있기도 하다. 하지만 그 절망을 어떻게 바라보고 설정하기로 결심했는가에 따라 결국 그 절망을 향한 나의 상대적 태도는 결정되는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있을 때 절망은 상대화된다. 절망이라는 그 정의를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순간 시간의 연결끈 속에서 결국 과거를 잠재울 수 있다. 동시에 현재 어쩔 수 없이 내던져진 실존적 상황 속의 내가 그 절망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가 결정되는 것이기도 하다. 절망은 나의 전경이 아닌 후경으로서 나의 배경을 드리울 수 있는 여러겹의 화폭이기도 하다. 자기연민으로만 그치는 절망은 결국 또다시 암흑으로 찾아올 것이고 자신을 완전히 없어져야할 존재로 깎아내려버리고 말 것이다. 하지만 나의 절망은 내가 수많은 선택들 중에서 가장 아팠던 선택들이고 내가 순간순간 치열하고 냉정한 시간을 거치며 살아왔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황량한 사막 위에 내가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의 결과를 담담히 받아들여야 하는 고독한 나를 사랑하고 이해해주는 것도 엄중한 현실인식과 함께 필요한 일이다.

이전 06화 예민한 성격을 다듬어 섹시하고 용기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