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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lack Cat Oct 09. 2021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힘을 주고 싶다면.

밥을 잘 먹으라는 말, 몸 아프지 말라는 말. ​

애정과 진심을 담아 많이 지쳐있는 누군가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기에 적절한 말이 무엇일까 항상 고민을 하며 따뜻한 차를 우러내어 고심에 빠지게 된다. 다른 사람이 나를 위해서 상담이라고 하고 해주는 말에는 가만히 보면 그 말을 하는 사람 자신이 살아온 삶과 부합하거나 그 자신이 겪어본 한도 내에서 얻어진 경험의 근거자료들에 의한 경우가 많다. 한 사람이 놓인 무기력함과 번잡한 일상 속 복잡함을 감히 헤아려서 어떻다고 단정짓기도 어렵고 내가 그 상황에 있지도 않은데다가 공감대의 접점이 제대로 맞지 않은 상태에서 이성적인 잣대를 들이댄답시고 이렇게 저렇게 들쑤시게 되기도 쉽다. 하는 일에 대해서는 좋은 해결책들에 대해서 많이 접해서 듣기는 하지만 점점 어른의 일이라는 것에 잘하는 정도의 기준이란 저마다 영역의 다채로움에 따라 세분화되어 달라지고 얼만큼 해야 최선이라고 할 수 있는지의 기준도 모호해지는 경우가 많다. 미디어에는 늘 힘이 나지 않아도 억지로 힘을 내야할 것 같고 저절로 춤이라도 춰야할 것 같은 밝고 경쾌한 소리가 왠지 거슬리게 다가오기도 한다. 그리고 살면서 누군가의 말을 들으면 그 사람이 진심으로 하는 말인지 의심이 가는 경우가 많아지기 이전에 수많은 타인들과 상호접촉하면서 내가 타인에게 대하는 것처럼 상대도 나에게 그럴듯한 진심이라고 전해주지만 표면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들여야하는 불가피한 에너지라는 것이 있다는 점을 우리가 자연스럽게 터득해가기도 한다. 말은 많은 경우 나의 몸을 관통하여 내 사고 경로를 타고 내 내면의 근육을 직접적으로 자극하는 방향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때론 말이 너무 내 안에 넘쳐나서 내가 어느새 그 자극에 무디어지고 아예 내면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내 표면을 미끄러져 나가는 말로 걸러지는 경우가 있다. 그렇게 어떤 감동을 줄 것 같은 말들도 점차 내 안에 진심으로 울림을 주기에는 내가 너무 체념과 자기연민에 갇혀있어서 한계가 있는 경우도 있는데다가 내가 살아가기로 한 방향과 확신이 제대로 선 경우라면 그 누구의 말이 타당성이 있다고 할 지라도 그저 나의 확신의 기회비용에 부가가치를 더 주게 되는 셈으로 그치기도 한다. 내가 무엇보다 내 일에 대한 불만족과 나 자신의 삶에 대한 비관으로 가득 차있어서 내 주변을 정리하지 않기 시작하고 물건들을 치우지 않고 쌓아둔 채로 방치해두게 된 것이 어쩌면 균형을 잃은 내 몸의 상태를 그대로 반영해주는 것이기도 했다. 나의 우울증은 무기력함이라는 흥건한 물기를 강하게 빨아들여 축축하고 무거운 상태로 내 몸의 중력을 버티는 것만이 매일을 살아내기 위한 고역처럼 느껴지게 만들고 그 누구의 지적도 마음에 들어오지 않았다. 힘겹게 매일 고루한 타성에 젖어서 대단한 의미를 내 삶에 부여하고 싶어서 잡기 시작한 글쓰기였는데 어느날 남자친구가 보내준 한마디가 이상하게 항상 들인 에너지 이상만큼 에너지를 소진한 것처럼 지쳐있던 내가 멍하니 글쓰다말고 천장을 쳐다보다가 큰 힘을 주는 것을 느꼈다. 

"밥 꼭 잘 챙겨먹어. 아프지 말고 건강해야해."

굉장히 일차원적인 위로이고 간단한 조언인데 내 몸을 먼저 챙기라는 그 간절함의 어조가 담긴 드라이한 한 마디가 이상하게 내게 큰 울림을 주었다. 그렇게 즉각적으로 내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결국 내 몸이 내 정신에 에너지를 제대로 주는 일을 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경우처럼 내 몸이 결국 중심이 되고 그 다음에 그 건강한 몸을 바탕으로 정신이 온전하게 흘러가게 둘 수 있다는 너무 자명한 진리를 온몸으로 겪고 나서야 깨달았다. 어딘가에서 본 연구에 의하면 내가 자기 스스로라도 내 몸을 쓰다듬고 여기저기 주물러주는 것만으로도 내 몸의 긍정적인 에너지가 올라간다는 것이었다. 그만큼 내가 나를 사랑한다는 말을 열심히 해주고 사랑한다는 글귀를 아무리 반복하고 수많은 결심들을 세운다고 할지라도 내가 내 몸을 하나 제대로 건사할 수 없다면 내 몸이 내가 해내고자 하는 일에서 요구되는 그만큼의 정신적 에너지를 낼 수도 없는 것이다. 어쩌면 잘 먹고 잘 자고 아프지 않는 것이야말로 원초적이면서 가장 우리의 직접적인 생명과 맞닿아있는 주된 삶의 동력이고 바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파블로브의 개처럼 자동 반응하듯이 우리의 원초적인 영역을 건드려주고 그 중요성을 상기시켜주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우리의 기본적인 정서가 안정되는 것처럼 균형 잡힌 상태를 유지할 수 있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마치 병에 걸려 힘든데 할 일이 많아 더 지쳐있었을 때 세상 그 누구의 위로 이전에 친절한 순대국밥집 아주머니께서 내어주셔서 뜨겁게 호호 불면서 먹었던 그 순댓국밥의 치열한 맛처럼 그 상황과 정서가 주는 힘이란 사실상 단순히 알약을 삼키는 것 이상으로 큰 힘을 준다. 나를 위해 나를 꾹꾹 누르고 나를 위해 좋은 밥을 예쁜 접시에 담아서 사진을 찍어 올리고 아주 맛있게 먹는 것, 예쁜 옷을 입고 소중한 사람과 예쁜 곳에서 나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두는 것, 이런 작은 사치와 자기 과시용 전시도 사실 어쨌거나 남이 뭐라고 하든 내가 나를 "아끼고" 나를 돋보이기 위해 "에너지를 부단히 투자한" 결과라는 증거이기도 하므로 그런 소소한 노력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나의 몸을 위해 내가 얼만큼 부지런히 애쓰고 노력했는지 자연히 내 몸이 내 정신보다 먼저 잘 터득하고 의식적으로 내 정신은 내 몸으로부터 소외받고 있지 않다고 느끼게 된다. 그러므로 내가 그만큼 누군가로부터 내 몸에 관해 주시를 받고 있고 나는 내 의지로 인해 내 육체가 그만큼 조종을 받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그만큼 내 스스로가 더욱 부지런한 관심을 받을 만큼 이 생애에 필요로 여겨지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나의 몸을 먼저 잘 챙기려고 노력하는 것이 나의 정신을 제대로 이끌어 올리기 위한 방법이며 내가 남을 진정 아끼고 좋아한다면 상투적인 수많은 복잡한 말들보다는, 우선 "밥은 꼭 잘 챙겨먹어야해."라는 기본적인 말부터 해보자. 그렇게 상대도 자신의 근육이 먼저 밥과 몸이라는 말에 꿈틀거리며 우선적으로 힘을 갖게 된다. 그런 몸의 일차적인 반응이 생의 에너지로 연결되어 자신의 정신을 보다 적극적으로 자신이 뜻하는 바대로 결정하고 선택해나가는 힘을 가질 수 있게끔 원동력을 주게끔 하는 것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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