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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lack Cat Oct 09. 2021

뜨겁고 순수했던 열정으로 가슴을 애태웠던 순정의 시대.

누군가를 위해 밤새도록 애태워서 걱정하고 그리워했던 마음

학교 앞에서 자취하던 젊은 20대 초반 시절 비탈길을 힘겹게 오르다 까만 밤하늘 아래 가로등을 한참 서성이며 바라보았던 적이 있다. 오렌지색 불빛이 나를 향해 조명을 드리우면 나는 시큰해지는 물먹은 어린 가슴을 쥐어 안았다. 가슴이 아프게 느껴지는 순간마저도 로미오와 줄리엣 속 비련의 줄리엣을 연상케하는 애상감을 만끽하던 때가 있었다. 그날은 내가 좋아하던 사람을 보고 싶었는데 혼자 짝사랑하던 그 사람이 일터에 나오지 않았던 날이었다. 괜히 그 사람이 자주 왔다갔다거리던 곳을 한 번 더 서성이기도 해보고 그 사람이 좋아하던 믹스 커피를 나는 그렇게 좋아하지도 않는데도 두어번 정도 타서 마셔보기도 하면서 그 사람이 없는 빈 자리를 혼자 맴돌기도 했다. 하루종일 무언가를 마주치면 모든걸 그 사람을 대입하곤 했다. 그 사람이 보면 어떻게 생각할까 고민하고 그 사람이 내가 생각하던 방향대로 행동하지 않으면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것일까 가슴 아프게 고민했던 기억이 있다. 그 사람의 기침 소리와 두꺼워진 옷차림에 괜시리 걱정을 하고 이렇게 무한대로 부풀어져있는 내 마음을 조금이라도 들킬까봐 두려워했다. 태연하게 더 큰 소리로 더 큰 보폭으로 말하고 움직이면서 어색한 티는 세상 다 내고 다녔던 것을 생각하면 아직도 얼굴이 화끈해진다. 한 사람을 정말 사랑하게 되면, 신체적으로 가슴 한 쪽이 먹먹해지고 무언가 물풍선이 점점 부풀어서 커지고 있는 것처럼 위태로운 폭탄을 달고 다니는 기분이 들었다. 그 사람의 분위기와 다정한 말투, 지적이고도 은밀한 내면에서 풍겨오는 풍취, 그 사람 주변을 스쳐가면 느껴지는 따스함 모두다 한 사람이 살아온 흔적이 그 사람의 내면 한장 한장의 기록으로 쌓여서 오래된 빛바랜 책을 움켜쥐는 것 같은 감성에 사로잡히고 만다. 그 사람과 사랑을 막상 이루었다면 그렇게 애달프게 느껴지는 감정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편했을거라는 단순한 단념이 그렇게 내게 쉽게 들지는 않았다. 한 번 지옥이더라도 그 사랑의 지옥 앞에 서성이고 싶었다. 어느 정도 내 마음을 이미 눈치 챘을 것 같은 그가 자존심을 지키느라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사랑이라는 이유로, 그리고 먼저 자신이 다가오기에 어렵다는 이유로 뒷짐지고 세상 눈치보고 있는 것을 지켜보는 것만큼 편안하지 않고 힘들게 하는 것도 없었다. 어떤 사람은 그런 사람은 쉽게 포기하라고 그런 사람은 어차피 만나더라도 너를 힘들게만 할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내 머릿속에서는 그 사람과 만나서 상처받게 될 수많은 시나리오들을 이미 상상해놓은 상태였다. 나는 내 나름대로 상처받기 전 예습을 마친 준비된 사람이라고 위안하고 그 다가올 확률이 있기는 한지 확실하지 않은 그 상처 앞에서 나는 괜히 꽤나 용감한 사람이나 되어있었다. 그냥 가만히 카페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맛있는 생크림 케이크를 먹는데 그 사람을 떠올리게 하는 비슷한 무언가만이라도 스쳐지나가도 목이 괜스레 막히고 속에서 위태롭게 부풀어오른 물풍선은 임계점에 다다라서 화장실에라도 가봐야할 것 같은 초조함을 느낀다. 캔커피를 사다가 생각이 나서 캔커피를 하나 더 사서 건네주고 싶은 생각을 자주 하게 되었다. 언제 적절한 타이밍에 전해줄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타이밍을 놓쳐서 내 가방 속에는 미지근해진 캔커피가 남아서 떼구르르 구르고 있는 때도 있었다. 그런 아련한 기억 속에서 그 사람도 흘러가는 내 삶의 한 물결이었다는 것을 힘겹게 인정을 하고 나서야 내 마음 속 전부가 순수하게 그 사람에 대한 열정과 걱정 고민으로 가득찼던 시기를 건너 그를 시냇가의 종이배처럼 띄워 멀리 보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마음 속에 그 사람을 순수하게 열망하고 그 사람이 나에게 시선을 주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벅차고 심장이 떨리던 그런 열정의 잔해는 어렴풋한 감각처럼 여린 멍으로 희미하게 남아있기는 하다. 

사실 순수하게 환상 같은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불가능을 허락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사람이 아니여도 이 세상에 충분히 대체될 수 있는 사람들과 만남의 기회는 얼마든지 있는데 그런 당연한 진리를 외면하고 굳이 그 사람을 난 운명처럼 만났다는 믿음에 사로잡혀 나의 환상을 부풀린다. 그걸 인생 전체로 보면 비효율이고 사치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 사람을 향해 열려 있는 모든 감각은 저절로 개방됨 그 자체이지 내가 개방하고 싶어서 그렇게 나를 쉽게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이 아니면 안되는 명확한 이유를 뚜렷하게 열거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냥 그 사람이라고 하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마냥 웃음이 지어지는 환상 속에서 나는 나의 감각과 본능에 충실했다. 내 온몸으로 그 시기를 관통해보고나니 그 사람과 완전히 몸에서 멀어지면서 마음으로 멀어지게 되었을 때 남는 잔해의 여파가 크기도 했다. 나에게 너무나도 큰 일이었는데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무관심으로 떠나버리게 되었을 때 나는 그 이후에도 계속 그 사람이 언젠가는 내 마음을 다시 알고 돌아와서 나를 잡을 것이라고 속으로도 가능성 없다는 것을 스스로 알면서 마음을 졸였다. 하지만 그 사람은 냉정히 나보다는 결국 본인이 나이 어린 여자에게 먼저 대시하면 흠이라는 자신의 생각 때문에 본인도 나에게 어느정도 호감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렇다고 은근한 표시를 분명히 냈는데도 불구하고) 돌아서서 그렇게 가버렸다. 그 사람에게 미련이 남은 것은 지금에야 당연히 없지만 내 인생에 거의 없을 그런 설렘을 안겨준 특별한 사람이기 때문에 나는 그 사람 자체에 대해서 특별한 추억으로 기억하고 있다. 누군가는 온 마음을 바쳐 시름시름 앓았던 당시의 내가 그렇게 사랑을 하는 행위에 빠진 내 모습을 사랑한 것 아니냐고 말해주기도 했다. 그런 사람들도 있겠지만 나는 그런 나의 사랑의 행위가 어쩔 수 없이 사랑이 "닥친" 사건 속에서 만신창이가 된 처지에 놓인 것이었다. 그런 상태에서 내 안에서부터 흘러나온 자연스러운 행위로의 사랑이었지 고의로 나를 고양시키기 위해 내 행동보다 자아도취에 중점을 두고 한 행위는 아니었음이 분명했다. 내가 스스로 사랑에 빠졌다는 마음을 숨기고 싶어서 어쩔 줄 몰라했고 진지하게 내가 그런 사랑의 늪에 빠지고 난 후라는 것을 인정하고 그 마음 속에 결국 철저하게 항복해들어간 것임을 나는 알고 있다. 그 마음의 무게에 짓눌려 내 마음대로 통제되지 않는 마음에 눈치를 보면서 그 사람을 향한 생각을 진정시키려고 애써보았다는 것도 분명히 알고 있다. 20대 초반 순수하게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해보고 그것도 실패한 사랑으로 남겨두고 흘려보낸 뒤 몇 번의 충동들이 있기는 했지만 대게 그 이전의 여파로 인해 그만큼 에너지를 많이 쏟지 못하게 되는 내 자신을 발견할 때면 내가 변한 것을 느낀다. 예전보다 이성 자체에 대한 관심이 존재 내면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그런 존재감에 대한 순수한 사랑으로라기보다 점차 그 사람이 무엇을 가진 사람이고 어떤 매력을 가진 사람인지 보다 거리를 두고 여러 사람들과 비교하며 바라보게 되는 내 자신의 시선을 느끼게 된 것이다. 매력도 지적 매력 감성적 매력 남성적 매력 여러가지 면모로 다양화해서 바라보게 되고 일종의 평가의 검열대 위에 올려놓는 일종의 항목으로 치부해서 그 사람이 가진 것의 항목들을 계산하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 정도면 다른 것들이 안되더라도 충분히 내게 이성적인 매력으로 끌림을 준다고 생각하며 천천히 관심이 달구어지는 쪽으로 대상과의 관계를 발전시켜가게 된다. 그렇다보니 무조건적인 존재 자체에 대한 끌림은 애초에 사람을 보는 눈 자체가 이전과 같지 않으니 예전처럼 찾아오기가 어렵게 되어있는 셈이다. 가끔 내 안의 여린 멍처럼 남겨있는 그 때의 순수한 열정을 떠올려본다. 지금 생각하게 되는 그런 조건들이 부차적일 뿐 그저 그 사람이라는 절대적인 이유로 그 사람이 내 안의 전부를 지배했던 마법 같은 찰나는 정말 환상 그 자체의 찰나였다. 소위 '콩깍지'라고 부르는 철저한 베일에 갇힌 채 내 모든 것을 내어주어도 괜찮을 것 같은 관대함으로 내 자신이 해제되고마는 그 열정은 내가 나만을 오로지 사랑하며 이기적으로 나만의 효율만 챙기기 바쁜 이 세상에서 기꺼이  비효율적인 소비를 내 자신에게 허락한다는 뜻이고 내가 편안할 수 있는 방법을 기꺼이 무릅쓰고 불편함을 감수하겠다는 과감한 의지였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불완전하고 흔들거리는 인간이기에 가질 수 있는 순수한 사랑이고 희귀하고도 존귀한 경험인지도 모르겠다. 순수한 열망이자 착각이었고 그 순간을 시름시름 앓고 불태우다 결국 사랑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그 환상은 잠시 그때 그 자리에 남아있고 그때의 우리를 추억하는 것으로 그 찰나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 결국 결말은 동화처럼 원하는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아름답지 않은 이 세상 속 그 환상의 빛을 내 안에 숨겨두고 그런 열정의 시기를 거치게 된다. 곧 지극히 평범한 일상의 타성에 젖을 우리를 위로하며 우리의 힘으로 일으켜내는 순간의 작은 기적과 감동들이 모여서 의미를 형성하고 그런 추상적인 의미에 의지하며 우리의 인생(人生)을 살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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