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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lack Cat Oct 09. 2021

자기 배려와 자기 연민의 경계를 명확히 하기.

푸코의 "자기 배려"에 맞게 내 영혼의 덕을 쌓아 고결하게 연마하기.

한참을 서럽게 아프고 우울함 속에 빠져 있다가 그 긴 터널을 나오면서 온몸으로 느낀 것은 이 세상에서 결과적으로 나를 돌보아줄 수 있는 존재는 물론 가족도 있지만 그보다 나를 온전히 나일 수 있게 강해지게끔 해줄 수 있는 것은 나 자신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 어떤 세상의 인식보다 내면의 거울 속에 비친 나의 모습이 어떻게 보이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자신은 매우 초라해보일 수가 있고 반면 매우 크게 보일 수가 있다.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내면의 검열 장치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관이 두드러지게 되는데 그것은 타인과 자신을 둘러싼 조건들을 평가하는데도 나 자신이 과연 만족할 수 있는지의 여부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내가 특히나 병이나 외부의 타격으로부터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게 될 때 내 몸이 우선 그 영향을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얼만큼이나 완충제로서의 방어 기능을 할 수 있느냐는 생각보다 정신적으로 얼만큼 내가 탄탄한 존재인지 내 스스로 인식하고 있느냐가 중요하게 작용한다. 내 자신이 세상과 비교했을 때 한없이 작고 가진게 없이 볼품 없게 느껴지기만 한다면 나는 그 타격은 나를 한없이 외롭고 힘겹게 느껴질 것이다. 나를 든든하게 지탱해줄 내적인 힘이 없다면 정신적으로 버텨내기 힘든 것이 고스란히 육체의 고단함으로 이어진다. 그런 비련한 내 자신을 버텨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자기에 대한 이해와 사랑으로 나에 대한 평가를 좀더 완화시켜줌으로써 세상에서 내가 외롭지 않은 존재가 될 수 있도록 나를 내가 돌보아주는 것이다. 생각보다 내가 내 스스로에게 들이대는 평가의 기준이 너무 야박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나를 좀더 관대하게 용서하지 못하는 것에서 오는 인식의 한계가 있어서 내면화한 기준치에 부응하는 가치관들을 좀더 유연하게 풀어주는 것이 필요하다. 우선 세상이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좀더 냉철한 자각과 함께 객관적인 조건들로 구성된 배치 가운데 나를 놓았을 때 나는 어느 정도의 지점에 서있는지를 파악한다. 다음에 내가 내적 구성물들 가운데 통제할 수 없는 영역과 내 능력으로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을 명확히 구별하여 나의 재량과 주변의 변수들에 대해서 헤아려보는 것이다. 그 가운데서 나에 대한 평가가 최대한 객관적으로 이루어질수록 나에 대한 제대로 된 "자기 이해"가 실행될 수 있다. 성숙해지면서 결국 의연해진다는 것은 상처를 안받을 만큼 강해진다는 것보다 나에 대해 좀더 신중하고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실패 가능성이 적은 선택들을 해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과감한 용기를 투척해야 하는 선택을 할지라도 그런 선택을 했다는 결단 자체에서 받아들이는 성패에 대한 탄력회복성이란 것이 필요하다. 탄력회복성이란 도전하게 되는 그 어떤 일이든 실패 가능성을 안고 시작한 일이기에 스스로 실패를 받아들이는 것에 있어 자신과 실패 자체를 어느 정도 구분해서 일 자체에 대해 냉정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심지를 가지는 태도를 말한다. 외부의 성가신 자극에서도 내가 어떤 자극이 와도 결국 내가 중심을 잡을 수 있는 가치관들이 올바로 서있고 충분히 사랑받아 마땅한 재원이 갖추어져 있다고 여겨진다면 나의 가치가 마구 헝클어져 있는 사람에 비해서 무슨 자극이든지 자신만의 가치 체계와 사유와 인지 도식이 명확하게 서있게 된다. 그래서 보다 흔들리지 않고 A를 B가 아닌 나만의 인지 방식에 따라 C라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되며 그 어떤 것도 나만의 고유한 존재자로서의 본질 자체를 건드릴 수 없다고 여기게 된다는 것이다. 나를 건드렸지만 내 존재의 본질로까지 닿지는 못했으므로 나는 그 어떤 외부로부터도 자유롭고 의연한 나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다.

자기 연민은 연약하고 헝클어진 나의 가치체계가 무너져서 내 중심이 마구 흔들리고 세상 속에 섞여서 나의 고유한 존재감이 탁하게 느껴질 때 냉정한 판단을 들이대기에는 나는 도마 위의 생선처럼 난도질당할 것처럼 너무 나약한 상태에 있다고 느낄 때 자기 비난의 지옥을 피해 들어서는 도피처와도 같은 곳이다. 나약한 도피처이기 때문에 이 세계는 온통 자기 이해가 이루어지기 전에 자신의 상처를 부풀려서 수없이 많은 미움의 대상들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세상이 객관적으로 어떻게 흘러가는지에 대한 냉정한 판단을 하기보다 자신의 실패가 피할 수 없는 것이었고 노력해서 극복할 수 없었던 것이라고 자기합리화를 함으로써 나약한 안주를 하게 된다. 자기연민은 끝없이 자신을 나약한 피해자로 자처해서 한없이 세상의 기준과 자신의 기준을 다같이 떨어뜨려놔야 그 하향평준화된 기준 속에서 발전 없는 나락을 만끽하며 위안할 수 있다고 믿지만 사실 자기 비난이 문앞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자신도 어쩌면 자신이 무엇보다 "비난"받을 것이 있다는 사실에 두려워서 "비난"을 마치 "악플"처럼 정면으로 직면하게 될까봐 문앞에 세워두고 문을 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차라리 세상과 나의 기준을 나란히 같이 낮추어 주변도 같이 깎아내리면서 나를 높여보겠다는 심산인 것이다. 그런 자기 비난의 다른 얼굴이 곧 자기 연민이나 마찬가지이고 우울증의 초반에는 솔직히 자기 비난에 시달리는 것보다 우선적으로 자신에게 어느정도 선함을 베푸는 마음으로 연민의 위로를 건네는 것도 괜찮다. 하지만 그 첫 충격의 시점을 지나 어느 정도 마음이 자기 비난의 아픔을 딛고 건너오면 자기 이해를 통해 자기 돌봄, 그리고 더 나아가 안했으면 좋았을 관계라든지 일에서의 그 실패에 대해서 좀더 명확한 실체로 냉정한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보다 객관화시켜서 나의 현재 지점이 기준치에 부합하지 못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우선이고 그 실패든 상처든 그 아픔 자체를 나라는 존재와 엉켜서 구별되지 못하는 시점으로 다다르지 않도록 거리두기를 해서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게 열심히 대상을 응시하고 파악하는 것만이 대상을 관계의 지옥도 속에서 초월하여 어느새 그 아픔이라는 감정이 중요하기보다 그 아픔을 준 실체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헤아려 보게 되는 노력이 중요하다. 결국 내가 상처를 입지 않기 위해서 보다 그 아픔보다 더 커져있는 자신으로 영혼을 단련시켜가는 것이 푸코가 말하는 "자기 배려"의 미덕인 것이다. 점차 내 삶에서 내가 나에게 맞는 것이 무엇이고 나를 바꾸게 하는 힘이 무엇인지 점차 깨달아가면서 움트면서 깨어나가게 된다. 자기 연민에서 훌훌 털고 나와 내가 나를 한없이 나약하게 연민하기만 함으로써 나에게 쉬운 우월감을 안겨주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하며 자기 기만으로 빠지지 않을 수 있도록 나의 의식을 조종할 수 있게 되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나를 살게 하는 힘들에 대해서 더 구체화시켜서 이해하는 것이 자기 이해이자 자신을 위해 작은 실천부터 해나갈 줄 아는 것이 자기 돌봄이며, 그것을 떠나 자신이 자칫하면 한끗차이로 자기 연민을 자기 배려로 착각할 수 있기에 자기 이해가 명확하게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기에 나를 나약하지 않게 만들기 위해서는 나에게 우선 닥치는 것들 앞에서 몸을 사리기보다 우선 관계든 일이든 몸으로 열정적으로 부딪혀보면서 나의 감각으로 얻어진 것을 나의 사유 체계로 잘 해석하고 수용하는 것이 절실하다. 그 감각의 통증을 그저 "나는 많이 아픈 사람"으로 주저앉게 만들 것인지 아니면 그 주어진 통증을 삶의 단서로 이용하여 자기 비난의 아픔을 두려워하지 않고 내가 최대한 감정을 떼어놓고 내게 주어진 것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앞으로 살아가는데 좋게 활용할 것인지의 차이다. 마음가짐을 하나 다르게 먹는 것이 얼마나 많은 나와 나에게 주어진 세상을 전부 다르게 허물고 재창조시킬 수 있을 것인지 그 진정한 "자기 배려"의 힘은 결국 작고도 큰 선택 하나의 차이에 달려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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