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도 무서웠고 서툴렀다는 고백
우리 집은 역할분담이 뚜렷했다. 가부장제도의 그림자가 여전히 짙던 시절, 직장인은 주 6일제였고 워킹맘보단 가정주부가 보편적이었다. 아빠는 욕심 많고 열정적인 사람이었고, 최연소 최단기 승진 기록이 있을 정도로 일에 진심이었다. 간혹 주말이면 아빠 사무실 문서 더미 옆에서 학습지를 풀던 기억이 있다. 그런 아빠를 엄마는 전적으로 지원했고, 아빠는 엄마의 살림과 교육에 일절 터치하지 않았다. 급여를 고스란히 건네고 용돈을 받아 쓰는 사람이었으니까.
엄마가 사라진 집안에서 아빠를 두렵게 한 건 어린 딸, 나였다. 매일 머리를 빗겨주고 손발톱을 잘라줄 만큼 딸바보였던 아빠지만, 그건 그저 사랑스럽게 바라만 보면 될 일. 2차 성징이 오고 여자가 되어가는 딸은 아빠에게 벅찬 숙제였다.
엄마 없이 맞이한 첫겨울, 그의 어린 딸은 초경을 했다.
어느 날 아침, 화장실에 갔다가 생전 처음 보는 핏자국을 마주했다. 평소 과민성대장증후군이 있긴 했는데 장이 탈이 난 걸까, 큰 병에 걸린 걸까. 몇 분 정도 멍하니 고민하다 깨달았다. '아, 이게 생리라는 거구나'. 그날 아침 식사자리에서 무심히 말했다.
"아빠 나 생리대 사야 될 것 같아."
아빠는 당황했다. 아니, 충격을 받았다. 그는 그날을 달력에 새겼고, 남몰래 누나에게 전화를 했다고 한다. "우리 딸이 생리를 하는데 어떡하냐"라고... 몇 년이 지나 고모에게 전해 듣기론, 그때 아빠는 내가 사고를 당한 것 마냥 걱정과 고민과 두려움을 토로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아빠 세대에겐, 여자가 생리하는 걸 부끄러워하거나 남자들 앞에서 가려야 한다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물론 잘못된 인식이고 나는 그것을 당연히 깼다.
우리나라 성교육은 늘 한 발 늦다. 요즘처럼 성인식이 개방적이고 첫 경험이 빨라진 것에 비해, 사회와 제도와 부모들은 너무도 보수적이다. 내가 기억하는 성교육은, 초등학생 때 2차 성징 정도, 중학생 때는 정자와 난자가 춤을 추는 애니메이션 영상 정도. 그나마 여고 1학년 때에는, 아주 확고한 가정 선생님의 의지로 전교생 수만큼 콘돔을 사서 모형에 직접 끼우는 실습을 했었다. 십여 년 전인 그때도 웅성웅성 난리가 났었지만, 실상은 그때 이미 경험 있던 친구들도 있었을 터. 교육이란 그런 것이다. 정자와 난자에 눈코입 붙여놓고 사랑의 결실이라 할 것이 아니라.
내가 당황했던 건 생리대였다. 대부분 구름, 목화솜, 핑크빛 일러스트가 들어간 ‘부드럽고 여성스러운’ 느낌의 포장지였다. 정작 중요한 '사용법'을 그려 넣는 생리대는 찾을 수 없었다. 그저 눈치껏 양 날개를 팬티 바깥으로 접어 고정시켰다. 그렇게 나는 아무도 모르게 생리를 시작했다.
소형 중형 대형을 차례대로 써봤다. 소형은 부족한 듯했고 대형은 낭비인 듯싶었지만, 어쩌다 한 번씩 양이 감당이 안 되는 날에는 이불이 피로 물들기도 했다. 두 어 해가 지나고 고모가 폐경이라며 넘겨주신 생리대로 오버나이트를 처음 써본 나는 신세계를 경험했다. 새벽 일찍 세면대에서 몰래 이불의 핏자국을 지우는 일은 없게 됐다. 고등학생 때 친구들을 통해 알게 된 팬티라이너는 내게 혁신이었고, 대학생 때 알게 된 생리용 팬티는 흰 바지도 자신 있게 입을 수 있는 혁명템이었다.
엄마가 있어도 언니가 있어도 자신의 생리패턴을 알아가기엔 꽤 많은 시행착오가 필요할 것이다. 30대가 접어드니 생리주기도 바뀌어 또 다른 어려움을 겪고 있는 중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엄마의 건강한 유전자를 받아 생리통이 없다는 것. 그게 혼자 조용히 겪어낼 수 있는 이유일 것이다.
우리 집안은 가부장적이었다. 엄마가 있을 때는 당연했던 그 구조가, 엄마가 사라진 뒤엔 오히려 나에게 벽이 되었다. 나는 그 벽을 하나씩 깼다. 생리가 시작하면 건들지 말라며 모두에게 공표하고, 생리대는 당당히 화장실에 두었다. 처음에 아빠는 "오빠도 있는데 생리대를 화장실에 두어야 할까?"라고 했지만, 나는 말했다. "인구의 절반, 모든 여자가 생리를 해. 생리대는 남자의 면도기와 같은 거야."
금세 아빠도 오빠도 수긍했다.
나는 여자가 생리를 '감춰야 하는 것'으로 여기는 사회가 싫다. 생리는 당연하고 건강한 것이다. 감기나 재채기 같은 것이라 생각한다. 굳이 드러낼 필요는 없지만, 부끄러운 일은 아니니까. 물론 그걸 이유로 직장이나 지인들에게 특혜를 받을 생각은 없다. 나 자신을 동정의 대상으로 치부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남자와 여자는 평생 서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같은 사람이라 해도, 겪는 것이 다르면 감정도 다르다. 그저 배려하고 존중해 주는 방법뿐.
우리나라 현행법상, 태아가 32주가 되기 전에는 성별을 알려주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 남아선호사상이 짙은 탓에 딸이면 낙태하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하지만 요즘은 딸을 더 원하고 아들이면 울기도 한단다. 내가 태어났을 때도 아들이 아니라서 조부모님은 병원에 안 오셨다고 한다. 그래도 공주소리 들으며 사랑받긴 했다. 지금도 여전히 오빠 걱정만 하시긴 하지만.
30대가 되어버린 딸을 가진 오늘의 아빠는 결혼 얘기만 나오면 식겁하신다. 누군들 아니겠냐만은 내 딸이 가장 아까운 것도 맞지만, 내 딸의 몸으로 임신 출산을 할 생각을 하면 손주가 미울 것 같다는 아빠. 초경으로도 그렇게 걱정 많았던 그였기에 임신은 거의 중증 수준인 것이다.
얼마 전 전 국민을 울렸던 드라마 [폭삭 속았수다]를 보며, 모두가 아버지 관식이의 삶에 눈물을 흘렸지만, 나는 딸 금명이의 출산 장면이 가장 아팠다. 나에겐 그런 순간에 엄마가 없을 테니. 여자의 출산만큼, 엄마를 그리워하게 되는 장면은 또 없을 테니까. 그저 생각만큼 그립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모든 일은 적응하기 마련이다. 처음은 어려울 수 있겠지만, 언제까지나 어려운 일은 없다. 결국, 모든 일은 익숙해지고, 시간은 어떤 고통도 일상으로 만든다. 누군가 먼저 겪은 일이 있다면, 그것을 자연스럽게 말해줄 수 있는 어른, 그런 어른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삶은 덜 두렵다. 아이들에게 길라잡이가 되어 줄 어른들이 조금 더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부모가 곁에 없는 아이들이라면, 가끔 어려운 걸 물어볼 수 있는 어른이라도 있는 삶이면 좋겠다. 혼자여도 일상생활을 영유할 수 있는 조금은 친절한 구조. 그게 우리가 만들어야 할 미래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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