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은 비밀이었다

나를 지운 자리

by Dear Mi

엄마의 3일장이 끝나고도 일주일 정도는 학교를 쉬었던 것 같다.

대부분이 그렇듯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는 남녀합반이었고, 담임 선생님은 갓 부임한 초년 교사였다.

첫 담임을 맡은 해에 학생의 상을 치르게 된 담임은 내 상황을 학급에 알리지 않기로 결정했다.

나를 보호한다는 판단이었겠지.

그 판단은 보호라는 이름을 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방임에 가까웠다.

학급 회장단 부모에게만 장례식을 알렸지만 그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전하는 건 당연한 일. 초년 교사의 목적과는 달리 소문은 생각보다 널리 퍼졌다.

나는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아이가 되었고, 동시에 숨겨진 사연을 지닌 아이로도 분류되었다.

그리고 친구들은 사실은 아는 자와 모르는 자로 분류되었다.


반면, 남중에 다니던 오빠의 담임은 전 학급생을 데리고 장례식장을 찾았다.

아이들은 단정히 교복을 차려입었고, 대부분은 생전 처음 경험했을 장례식장에서 조심스럽게 절을 하고 인사를 건넸다.

그 모습이 참 기특하고 고마웠던 기억이다.

그날의 오빠와 친구들은 어른보다 어른 같았다.

공손함과 슬픔을 배운 아이들이었다.


이 두 풍경은 지금도 나를 붙잡는다.

단지 두 살 차이였지만, 두 학교의 판단은 극명하게 갈렸다.

그리고 나는 아이들 앞에선 숨었고, 오빠는 아이들 앞에서 위로받았다.


어린 나에게 사회는 울타리가 아니었다.

사회는 내게 숨겨야 할 사연을 만들었고,

조심해야 할 시선이었고,

설명하지 못할 구멍이었다.


그날 이후로 나의 노력은 ‘결핍’을 숨기기 위함이었다.

엄마를 따라다니던 마트는 이제 아빠 손을 잡고 다녔고, 도시락이 필요한 일에는 나의 손길만이 묻어났다.

아파트 상가 초입에 위치했던 문방구, 매일 사탕을 사 먹던 단골집이었지만 나는 한동안 발길을 끊었다.

어느 날 들른 문방구에서 사장님은 내게 물었다.

“엄마 어디 여행 가셨니? 안 보이시네.”

나는 얼떨결에 “네, 좀 멀리요”라고 대답했고, 집에 돌아와 한참을 울었다.

그 여행이 돌아올 수 없는 길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빠 말로는 내가 이유 없이 구토를 하고 조퇴한 날이 몇 번 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어린 몸이 감당하기엔 벅찼던 스트레스였겠지.

지금까지 앓고 있는 '스트레스성 위장장애'의 역사는 그때부터였나 보다.


한동안은 매일 아침 안방 문을 열었다.

마치 긴 꿈에서 깬 듯, 엄마가 여전히 거기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안고.

그 환상에서 깨어나는 데는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몇 달이 지나 아빠가 물은 적이 있다.

"오빠 학교는 매번 학부모회의 참석하라고 문자가 오는데, 너희 학교는 연락이 없네?"

아는 학부모 하나 없었던 나는 연락처가 잘못됐나 싶었지만, 학급 회장이던 친구에게 이유를 들을 수 있었다.

학부모 비상연락망의 내 이름 옆엔 이렇게 적혀 있었단다.

‘모친상’


나에겐 '학부모'에 포함될 수 있는 존재가 분명히 있었지만,

학교는 나의 모를 삭제시켰다.

돌봄의 대상에서 빠졌고, 학부모의 정의에서 배제됐다.

그저 나는 엄마가 없는 아이였고,

꽤 긴 시간 동안 그 말은 나를 가두는 말이기도 했다.

내가 누구인지를 설명하기 전에 먼저 떠올라야 하는 수식어처럼.


나는 꽤 오랫동안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감췄다.

그땐 이혼율이 지금처럼 높지도 않았고, 비혼이나 딩크 같은 형태를 인정하지 못했으니까.

아이들은 '정상가정'이라는 좁은 프레임 안에서 자라났고,

그 밖으로 조금만 벗어나도 흥미로운 구경거리나 수군거림의 대상이 되었다.


부모가 하나인 가정은 ‘결손’이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그 결손은 아이에게 ‘문제’라는 가능성을 덧씌웠다.

그 시선은 아이들의 것이기도, 어른들의 것이기도 했다.

누군가의 부모가 했던 말,

“엄마 없는 애랑 놀지 마.”

드라마 대사처럼 들리는 저 말은, 실제로 존재하는 현실의 언어였다.

아이보다 더 무지했던 건 어른들이었고, 그 무지가 누군가의 상처가 된다는 걸 모르는 시대였다.


사회의 무지는 종종 구조적인 폭력으로 이어진다.

한부모가정은 여전히 공식 문서에서 ‘결손가정’으로 표기되었고,

오빠가 군대에 갔을 때는 한부모라는 이유만으로 '관심병사'로 분류되었다.


그래서 나는 너무 일찍 '다름'을 배워야 했다.

엄마가 없는 삶, 네 식구가 아닌 세 식구의 모습은

나만의 사정이 아니라 사회가 바라보는 '이질감'이었다.


엄마가 없는 아이로 시작했지만,

그 이름 하나로는 설명되지 않는 삶을 살아왔다.

나는 더 이상 엄마의 부재로만 규정되는 사람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 시간 때문에 지금의 내가 되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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