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lanc 블랑 Sep 23. 2024

나와 같은 색, 어린 그대의 색, 보스턴에서

보스턴 (1)

하버드 대학교의 유명 카페 <Tette> 의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퀵드로잉 한 스케치.



도착지는 보스턴이었다. 인천에서 디트로이트 공항까지 간 다음, 거기서 입국심사 후 최종 목적지까지 가는 여정이었다. 대한항공 공동운항 델타를 타서 그런지 한국인 승객이 많은 느낌이었다. 가는 동안 옆자리에 앉은 분들을 드로잉하며 잠시 대화를 나누었다. 젊은 남성분은 공부를 하러 학교로 향하는 대학원생이었다. 그는 심심할 때면 작은 큐브를 맞췄는데, 좁은 의자에서 14시간을 가만히 앉아 기내식을 먹다 잠들다 하는 긴 비행시간에 그렇게 눈길을 끄는 순간이 몇몇 있었다. 대각선 앞에 앉은 여성분이 나를 돌아보며 눈인사를 해주시기에 답해드리고 그 분의 모습도 그려드렸다. 옆자리엔 남편분이신 것 같았는데 아마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지 않으셨을까. 사람들은 그렇게 잠시 같은 길을 가는 동료가 되어 하늘 위의 시간을 공유한다. 비행은 그래서 단순하지만 단순하지 않다. 거기에 사람이 있으니까.


디트로이트 공항에 도착해서 내릴 때 한국인 승무원 분이 그림 정말 감사하다고, 처음 받아본다고 인사를 건네 주셨다. 나는 내 그림이 항상 누군가에게 작은 기쁨의 순간이 되어 세상의 행복에 기여하길 바라므로, 그 때의 인사 또한 고된 업무를 마치셨을 그 승무원 분께 약간은 피로를 풀어드릴 수 있는 일이었으리라 상상하는 지금, 다시 한 번 보람을 느낀다.


긴 비행시간, 승무원 분과 주위 승객분들을 그려 드렸다.


입국은 쉽지 않았다. 미국 첫 입국심사가 까다롭다더니, 그 주인공이 내가 되고 말았다. 아직도 무엇 때문인지 이유는 모른다. 말로만 듣던 소위 뒷방, 오피스에 따로 들어가 다시 한 번 질문 세례에 하나하나 대답하면서 나도 역시 긴장할 수 밖에 없었다. 다행히 늘 챙겨 다니는 작가 명함과 드로잉들이 내 신분에 대한 항변이 되어 주었는지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렇게 미국 땅을 처음 밟았다. 맨 땅이 아니라 공항 내부이긴 하지만, 아무튼 디트로이트 공항 내부는 굉장히 넓었다. 한낮의 푸른 하늘과 햇살이 끝없는 통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데 솔직히 피곤해서 얼른 보스턴에 도착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다.


디트로이트 공항은 안에 모노레일이 다닐만큼 크다.



보스턴의 의미, 기원을 찾아


보스턴은 미국 동부 끝쪽에 있는 도시로, 하버드 대학교와 메사추세츠 공과대학교가 있어 학문적인 소도시의 이미지가 강한 곳이다. 나의 최애는 생명공학 분야의 연구자인 아버지와 예술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아버지가 하버드에서 연구하던 어린 시절 몇 년을 보스턴에서 보냈다.


세상에 대해 하나하나 배우던 네다섯살 시기 나의 기억을 되감아보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아빠가 그려 준 내 얼굴이다. 아빠의 무릎에 앉아 봤던 작은 스케치북 속 내 모습이, 내가 태어나 봤던 최초의 원화와 다름없다. 또 다른 기억은 내가 아니라 엄마가 갖고 있는데, 다섯살 때 달에 관한 시를 쓴 것이 내 생에 첫 글짓기라고 했다.

나는 몇십 년을 그림을 좋아하다 사랑하다 작가가 됐다. 그림만 그리는 작가가 아닌 -지금 이렇게 에세이를 쓰고 있듯이- 글을 함께 다루는 창작자가 된 기원은 어디에 있을까. 아빠의 스케치북과 엄마가 읽었다던 달의 시가 그 처음 부분에 놓여져 있을 것이다.


‘기원’


그것은 또한 내가 보스턴에 온 이유이기도 했다. 애정하는 아티스트의 세계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궁금할 때 그것을 탐구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다. 창작물을 분석하는 건 기본이고 작업에 관한 인터뷰의 말들을 하나하나 여러번 되새기기도 한다. 여기에 나만의 방식이라고 한다면, 드로잉을 통해 아티스트에게서 받은 영감을 그려내는 작업을 꼽을 수 있다.

때로 누군가의 팬은 좋아하는 대상을 구성하는 것들을 살펴보고 자신의 경험으로 가져온다. 물건이라면 같은 제품을 구입하거나, 그가 방문했던 장소에 가기도 한다.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내면과 세계와 성장에 집중하는 나같은 사람에겐 그러니까, 그 사람의 유년시절이 만들어진 도시에 온다는 것이 아주 특별한 경험이 된다. 그의 ‘기원‘을 알고 싶은 마음의 방향성에 부합하는 행동이다.


보스턴으로 향하는 조그마한 비행기로 갈아타니, 한 눈에 봐도 교수님이나 점잖은 직장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앞쪽 복도 자리에 앉은 소년이 보였다. 이제 초등학생이 되었을까 아닌가 싶은 그 아이에게서 그 시절의 최애가 겹쳐 보였다. 연구하는 아버지의 옆자리에서 호기심 어린 눈을 깜빡였을 그 애가 살던 도시는, 어떤 모습일까.

비교적 소규모의 보스턴 공항에 내렸다. 이제 건물 내부가 아닌 진짜 미국 땅을 밟는 순간. 캐리어를 찾는 곳 바로 앞이 시내로 가는 여러 셔틀버스의 정거장이어서 열린 문 사이사이로 보스턴 풍경을 처음 눈에 담으며 ‘찰리패스’를 구입했다. 찰리패스는 종이 재질의 대중교통 이용권인데, 앞면이 클래식한 일러스트로 디자인되어 있다. 아주 작은 부분이지만 이런 사소한 순간에서부터 작가는 환영받는 느낌을 받는다. 그림이 쓸모 있게 오래 사랑받을 수 있구나 하고. 어떤 고유의 따뜻한 것이 사람들 속에 살아있는 도시일 거라는 첫인상과 함께 찰리패스를 손에 쥐며 문 밖으로 향했다.




보스턴의 색감은 나와 같아서


보스턴 로건 국제공항에서 숙소가 있는 다운타운까지 가려면 몇 가지 방법이 있다. 한낮인데다 혼자라 우버를 탈 필요는 없을 것 같아 시내버스를 선택했다. 시내에서 공항으로 나올 때는 돈을 내야 하는데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갈 때는 무료다. 또 이런 조그마한 데서 여행객은 감동한다. 버스 요금 정도는 부담스럽지 않지만, 그래도 우리 도시에 들어오는 사람들을 환영하는 느낌이랄까?


다운타운으로 가기 위해서는 일종의 큰 환승역인 사우스 스테이션(South Station)까지 SL1이라 쓰여진 버스를 타고 가서 원하는 교통수단으로 갈아타면 간단하다(이 때까지는 간단하다고 생각했다.). 버스기사님도 친절하고, 내부는 깨끗했으며, 작은 과일을 플라스틱 케이스에 담아가는 대학생이나 멋진 모자를 쓴 관광객 너머 유리창으로 파란 하늘과 정갈한 건물들이 펼쳐지는 보스턴의 첫인상은 ‘그림같다’. 그것도 내가 평소에 그리던 그 그림 속의 색감과 건물들이었다. 아, 나와 파레트가 같은 도시구나. 이럴수가.


보스턴의 색감이 내 파레트와 같다는 것은 크게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첫 번째로는 그동안 내가 마음 속에서 마음에 들어 조합하고 선택한 색과 모양들이 실존하는 곳을 찾았다는 사실. 작가에게 자신이 그리는 세상이 실재함을 경험하는 일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기원을 따지자면 수많은 이유와 순간들이 얽히고 엮이고 녹았다가 굳으며 만들어진 파레트 위 나만의 색들을 만나는 건, 아티스트로서 자신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힌트를 찾은 기분에 가깝다. 그것이 태어나거나 자란 도시가 아닐지라도. 사람에게는 처음 보자마자 마음의 고향이 되는 곳도 종종 있지 않던가.

여기에서 자랐던 사람은 나의 최애다. 나는 그 사람이 지닌 지금의 색들의 기원에 있는 풍경이 궁금했다. 유년시절의 기억은 짧든 길든 성장하는 마디마디에 남아서 이후 더 키가 커지는 동안 내내 우리의 밑거름이 된다. 어른들을 한참 올려다봐야 했던 시절의 세계는 우리의 베이스 컬러가 되어 그 다음 색이 되는 데에 영향을 미친다. 내가 아빠의 무릎에 앉아 아빠가 그린 내 초상화를 보고, 매일 안방에 틀어져 있던 이름 모를 팝송들로 눈을 떴던 것처럼-


내 아티스트의 작은 세계를 구성했던 그 도시의 컬러가, 출처를 모르던 나의 파레트와 같다니.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애정을 운용하겠지만, 그림을 그리는 내게는 이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보스턴은 그렇게 내가 가장 사랑하는 방식으로, 도착하자마자 나를 행복하게 했다.










이전 02화 뉴욕행 포기 직전: 작가로 출장갈 수 있다니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