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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은 그냥 가지 않는다

by 안종익


일찍 자는 버릇이 생겼는데, 달리 할 일이 없어서였다.

오늘따라 일찍 자리에 들었지만 잠이 쉽게 오지 않는다. 한참을 뒤척이다가 한잠 자고 일어나니까 아직도 초저녁이다. 그냥 잠깐 존 것이다. 잠은 오지 않고 밤새 온갖 생각에 시달리는 밤이었다. 시달리기도 하면서 수많은 생각들이 지나간다. 그렇게 뚜렷이 기억나는 것은 없는 생각들이다.

그래도 새벽녘에 잠시 잠이 들어서 일어나 보니 아침이다. 피곤한 하루가 시작되었다는 마음과 몸이지만 막상 일어나니까 생각이 달라졌다. 어젯밤의 피곤함과 무기력함보다 감사하다는 생각을 하고 싶어졌다.

오늘 자체가 또 다른 하루를 선물 받았다는 마음이 들자 소중한 날이라는 마음과 감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시작은 하지 않아서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오랜 꿈이었던 세계 일주를 시작할 생각이다. 시작이 일단 출발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대략적으로 병원에 가서 몸 상태를 확인하고 출발하려고 검진을 받으려 간 것이다. 실제는 별로 받은 생각은 없었고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아픈 곳이 나오면 치료하는 것이라는 마음이지만, 그래도 피검사만 하면 기본적인 것은 알 수 있다는 말에 그것만 검사하려고 병원에 갔다. 기본만 해 달라고 하니까 위내시경을 포함해도 그렇게 검사하는 시간이 차이가 없다고 했다. 마음에 준비가 되지 않았지만 검사 후에 회복이 늦다는 수면내시경을 하지 않았다. 그냥 해보니 고통은 상당했고 참을 만했다.


검진을 받으려고 어제저녁부터 오늘 아침도 굶은 상태이다.

아침부터 비가 내려서 검사를 빨리 받고 아는 지인과 같이 점심을 먹으면서 막걸리 한 잔이 간절했다. 비 오는 날 아직도 약간 추위가 있어서 한잔하기 좋은 날이었다. 언제부터인지 술을 먹는데 별로 시간에 구애받지는 않았다. 오히려 늦은 저녁보다는 낮이 더 좋다는 생각이다.

검사 결과는 2주 뒤에 나온다니까 그때 가서 생각할 일이고, 오늘 하는 위내시경도 별로 이상이 없을 것이라는 쪽으로 마음이 가고 빨리 끝나기만 바랬다. 위내시경은 예전에도 위염 소견이 늘 있었다. 오늘도 위염 소견이 나올 것이라 예상을 했다.


모든 검사를 마치고 소화기내과 의사실 앞에서 기다렸다.

많은 사람들이 의사의 설명을 들으려고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나도 한참을 기다리니까 이름이 호명되었다. 젊은 의사분이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서 검사한 모니터를 보면서 설명을 했다. 십이지장 부근에 물혹이 있어서 떼어서 조직 검사를 의뢰했고, 그리고 위염 증상에 대해서 모니터를 보면서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식도성 위염이나 역류성 위염이 아니라 만성위염이라고 하면서 상당히 심하다고 했다. 이렇게 심하게 진행되었는데 방치하고 있느냐의 뜻과 건강이 나쁘다는 메시지를 주고 있었다.

이 만성 위염은 치료가 되지 않고 위암으로 가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설명과 일 년에 한 번은 위내시경 검사를 받아야 한다는 진단을 내린다. 그러고는 2개월 위장약을 처방받았다.

내 인상이 기분 나쁘게 보였는지 젊은 의사분이 너무 심하게 말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의사가 하는 말을 무겁게 받아들여진다. 몸이 탈이 날 때가 된 것이

다. 세월은 시간만 가는 것이 아니라 몸도 같이 늙어가는 것이다.


약국에 들러서 약을 사 가지고 나왔다.

검은 비닐 종이에 가득하다. 흔히 노인들이 약국에서 나올 때 들고 나오는 것과 같은 모양새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노인들이 손에 들고 가는 약봉지가 나는 아직 오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내가 그 노인들과 같은 크기의 약봉지를 들고 있다. 실제로 나도 이제 주위의 노인들과 같은 것이다. 오직 내 마음만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을 뿐이고 몸은 정상적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세월은 모두와 같이 공평하게 가는 것이다.


지인과 약속한 곳으로 점심을 하러 간다.

잘 아는 순대 국밥이라 걸어가는 중이다. 그런데 아직도 비는 내리고, 비 내리는 날씨가 을씨년스럽고 춥기까지 했다. 걸어가면서 마음이 한없이 처량하고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은 외톨이가 된 기분이다. 세상의 마지막이 멀지 않았다는 느낌과 혼자라는 생각도 느낀다.

지인과 막걸리 한잔하고 가방점에 가서 여행 갈 가방도 찾아볼 생각이었지만, 집으로 가고 싶은 마음뿐이다. 이미 약속한 점심이니까 점심만 먹고 집으로 갈 생각이다. 처음에 병원에 올 때 와는 완전히 다른 마음이 된 것이다. 만성위염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몸이 아프다고 하니까 모든 생각이 그쪽으로 간 것이다.


집으로 돌아와서 별생각 없이 멍 때리고 저녁도 먹지 않았다.

잠을 자려고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고 있지만 잠이 들지 않는다. 새벽녘이 되어서야 방안에 불을 끄지 않고 그대로 잠이 든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니까 어제저녁과 다른 기분이다. 지난 저녁 동안에 내가 처한 현실을 받아들이고 인정한 것 같은 기분이다. 그렇게 하려고 마음이 의도한 것인지도 모르는 일이다.

할 수 있는 만큼 하고 그리고 감사하자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여행도 꼭 한다는 것보다 하고 싶고 가능한 만큼 해야 할 것 같다. 더 겸손해져서 이만큼 산 것도 많이 살았다는 마음마저 든다.


멀리 하늘과 맞닿은 산을 바라볼 때면, 사람도 거의 없고 조용한 산속에 세월이 가는 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을 것만 같다.

세월이 가면서 보지 못했거나 세월이 깜빡 지나친 노인들이 더러 있을 것 같은 기분이지만 아직은 보지 못했다.

실수하지 않는 세월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우리의 마음을 더 낮아지게 만들고 조용해지게 한다.

세월이 그냥 가지 않으니까 아프지 않고 그냥 가는 세월은 행복한 시간 들이라고 생각해 본다.

그냥 가지 않는 세월이니까 세월처럼 무엇이라도 하면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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