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돌아온 고향>
모친의 관을 이제 운구차로 이동을 해서 장지로 출발을 하면 된다. 운구를 막내 남동생 친구들이 나와서 도와주었다. 이른 아침에 수고해 준 것이다. 이날도 또 매섭게 추운 날이었다. 장지는 고향에 준비했었다. 전날에 미리 작업을 시켜 놓았기 때문에 도착하면 바로 매장을 할 예정이다. 모친은 본인이 죽으면 화장을 하지 말고 매장을 해 달라고 평소에 말씀하셨다. 그래서 모친의 뜻에 따라서 매장을 선택한 것이다.
사실 요즈음 매장을 하지 않고 화장을 많이 한다. 산소를 쓸 곳도 별로 없고, 쓸 장소가 있어도 중장비가 들어갈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소위 명당이라고 해도 깊은 산에 쓰기란 어렵다. 이 장지를 마련하는 대는 곡절이 있었다. 누구나가 가능하다고 생각한 곳에 매장 여부를 타진해 보니까 아주 가까운 친척이지만 거절을 하는 것이다. 본인들의 땅이니까 거절을 하니까 어쩔 수가 없었다. 엄마를 그곳에 모셔도 땅 주인에게는 지장이나 애로가 없는 곳이었다. 벌써 산이 되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산으로 남을 땅이다.
그래서 거절이 예상되는 조금 먼 친척의 땅을 또 여쭈어보니까 여기는 승낙을 했다. 사람은 촌수보다는 그 사람은 생각하는 폭이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모친을 모신 곳은 두 곳이 아니고 또 다른 곳이었다.
증조모 산소가 있은 곳이다. 이 자리에 묘 터가 나지 않을 것 같은 위치이지만 막상 묘를 쓰는 사람이 보는 눈에는 한 자리는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친척에게 얻은 장소와 이 장소를 비교해 보니까 이 장소가 더 따뜻하고 좋을 것 같았다.
운구차는 마지막까지 아파서 누워 계시던 도시를 떠나서 고향으로 향했다. 그렇게 가고 싶어 하던 고향을 살아서는 못 가고, 고인이 되어서 돌아가는 것이다.
마지막 가는 길에는 그토록 바쁘다던 자식들도 모두 같이 가고 있다. 이제 같이 갈 수 있는 길은 장지까지이다. 장지에서 영원한 이별을 하는 것이다. 운구차 안에서는 모두가 말이 없었다. 일찍이 출발해서 도로에 차량이 많지 않았다. 간밤에 눈이 내려서 도로 사정이 염려되었지만, 결빙구간이나 눈이 쌓인 곳은 없었다. 중간에 휴게소에 한 번 쉬고 곧장 장지로 향했다.
고향 부근에 들어섰다. 먼저 모친이 태어나서 자란 곳을 지나갔다. 비록 지나가면서 볼 수밖에 없었지만, 모친의 고향이면서 외가 마을인 “흥구”를 지나고 있었다. 선두에 선 영정 차량이 이곳을 지날 때는 서행을 했다. 이곳을 왜 서행하는지 아는 사람은 몇 사람뿐인 것 같다. 다시 운구차는 고향으로 들어오는 선바위가 보이는 곳으로 진입을 했다. 이제는 고향이 불과 얼마 남지 않았다.
멀리서 고향마을이 보였다. 시집와서 병원 외에는 한 번도 떠난 적이 없는 곳이다. 병상에 계시면서도 그렇게 가고 싶었고 그리워하던 곳이다. 모친이 사시던 집은 마을 입구에 있었다. 영정 사진을 들고 살던 집에 들어갔다. 늘 기거하시던 안방에 들어갔다. 변한 것은 없었지만 모친만 그 자리에 없었다. 막상 안방에 들어가니까 모친은 이제 이곳에 없고 다시는 올 수 없다는 생각에 눈물이 났다.
특히 바로 밑에 동생이 매우 슬퍼했다. 여러 방을 보면서 나오려고 하는데 고향 목사님이 생전에 살아 계실 때 생활하던 모습과 이 방에서 하시던 말씀을 설명하니까 더욱 마음이 아팠다. 살던 집을 뒤로하고 젊어서 오랫동안 살던 집으로 향했다. 시집와서 육 남매 모두 이곳에서 나았고 키운 곳이다. 이제는 도 문화재가 되어서 관리되고 있는 집이다. 들어가 보고 싶었지만, 문이 잠겨 있어서 담장 너머로 들여다보고 돌아섰다. 살면서 애환이 있는 집이다. 부친을 먼저 보낸 곳이기도 하고 모진 시집살이를 하던 곳이기도 하다.
마을에서 평소에 다니던 교회로 향했다. 이 교회에서 기도하면서 말년을 보낸 곳이다. 친절하게도 고향 목사님이 모친께서 늘 앉아서 예배드리고 기도하던 자리로 안내하셨다. 언제나 이 자리에 앉아서 예배드리고 누가 이 자리를 앉으면 비켜 달라고까지 하였다는 것이다.
이 자리에서 자식을 위해서 수많은 기도를 올렸을 것이다. 물론 자식들이 무탈하고 잘 되라는 기원이었을 것이다. 목사님이 자식들이 이렇게 자리 잡고 사는 것도 어머니의 기도 덕분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마을에서 60여 년을 살았던 “흥구댁”은 이제 마을을 지나서 조금 떨어진 평생 계실 장지로 향했다. 그동안 알고 지내던 친구나 마을 사람 누구도 나와 배웅하지 않았다.
동네가 조용했고 보이는 사람이 없었다. 구경하는 사람도 없었다. 다시 운구차는 마을에서 출발하여 장지에 도착했다. 벌써 작업은 많이 진행되었다. 장지는 운구차가 바로 앞에까지 갈 수 있었다.
하관 준비가 모두 마친 상태였다. 하관이 시작되었다. 모든 자식들과 자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찬 겨울 땅에 묻히는 것이다. 막상 땅속으로 묻히는 것을 바라보는 심정은 이별을 실감하고 있었다. 흐느낌이 깊어지고 있었다.
이제 하관 예배를 드리면 영원히 매장하는 순서이다. 하관 예배는 고향교회의 목사님이 주관하셨다. 목사님은 엄마를 오랫동안 같이 신앙생활을 인도하셨고, 실제로도 엄마를 많이 도와주신 분이다. 엄마의 신앙생활이나 평소 생활도 너무나 잘 아시는 분이다. 그 하관 예배 말씀은 모두의 가슴에 감동을 주면서 평소에 열심히 사신 모친의 자취였다. 이제 이별이 멀지 않은 것을 실감했다. 예배의 마지막 순서는 “취토”라고 전 자식과 자손들이 흙을 넣어주는 행사이다. 각자가 모친의 가족이었고 자손이었다는 의미를 생각하는 시간이었다. 하관 예배가 끝나고 매장을 하면서 분봉도 만들기 시작했다.
하관 예배가 끝나니까 지관이 와서 기독교식이지만 분봉을 만들 때 다지기 위해서 덜구를 찌어야 한다고 했다. 기독교식으로 예배를 하지만 덜구도 찢는 집도 있다고 했다. 사실 나는 이런 경험을 중학교 때부터 있었다. 이 덜구란 행사는 상여꾼들이 선소리와 함께 고인의 명복을 빌면서 자손들에게 노잣돈 명분으로 돈을 얻어가면서 산소의 흙을 다지는 것이다. 고래로 내려오는 풍습이다. 상두꾼의 말대로 모친도 편안히 가시고 고생하는 상두꾼들의 노고에 감사하면서 노잣돈을 드리고 싶었다. 묘가 분봉을 마치고 주변 정리를 하니까 좋아 보였다. 주변의 경관과 어울리고 무엇보다도 따뜻한 기분이 들었다.
아침에 일찍 해가 떠서 저녁에 넘어갈 때까지 햇빛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원래 이곳에는 바위나 암반이 나올까 염려를 했는데 나오지 않았다. 또 땅도 물이 없는 곳이라 더욱 좋은 것 같았다. 모친을 좋은 곳에 잘 모신 것이다. 멀리서 지나가면 아주 잘 보이는 곳이기도 하다.
어머니가 영원히 안식하실 곳이 편안한 것은 살아서 좋은 일 많이 하셨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