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지가 가까워지니까 새벽이 한참을 지났는데 아직 하늘은 훤하게 밝아오지 않는다.
창문을 열러 보니까 눈이 하얗게 내려 있었다. 그렇게 많이는 내리지 않았지만 땅은 보이지 않을 정도이다. 밤새 첫눈이 내린 것이다. 첫눈이 내린 아침은 고요하고 바람도 불지 않는다.
집을 나와 첫눈이 내린 길 따라 아침 산책을 걸어간다. 멀리 보이는 산꼭대기는 하얗게 눈이 쌓인 것이 보이지만 가까운 보이는 산기슭은 쌓인 눈은 별로 없고, 소나무 위 푸른 가지에 하얀 밀가루를 살짝 뿌려 놓은 듯하다.
마을의 지붕 위의 눈들도 골목에 내린 눈처럼 하얗게 덮여 있다. 아직 아무도 다니지 않는 동네는 멈춘 듯 움직임이 없고 새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하얀 세상이다. 오늘이 보름날이 되었는지 산 위로 넘어가는 달이 유난히도 크고 밝게 비추고 있다. 가을걷이가 끝난 눈 내린 들녘과 산 위로 넘어가는 달이 한 폭의 동양화를 만들면서 조용한 산골 마을에 아침이 밝아온다.
겨울이 오고 찬 바람이 불면 연인들은 첫눈을 기다린다. 특별한 것은 없지만 첫눈이 오면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마음이었다. 연인이 없는 사람도 첫눈이 오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것 같은 마음으로 기다리는 것이 첫눈이다. 젊었을 때는 그렇게 첫눈이 내리는 것을 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렇게 마음같이 첫눈이 내리는 것을 보고 싶은데, 오늘처럼 밤새 소리 없이 내리면 첫눈이 아니라고 우기고 싶은 마음도 들 것이다. 첫눈이 내리는 날은 누군가를 만나고 싶고, 만나서 아름다운 이야기를 나누면서 잊지 못할 추억을 간직하고 싶던 때가 그렇게 오래 전은 아니다. 지금은 그런 마음보다 차가운 아침 공기에 너무 춥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래도 바닥에 내린 눈을 밟으면서 마음이 상쾌해지고 마음 한구석에 야간의 설렘이 자리하는 느낌이다.
멀리 보이는 산속으로 들어가는 듯한 길을 따라 한없는 이어진 길을 걸어간다. 눈 내린 길에는 자동차 바큇자국이 나 있다. 자국은 겹치기도 하지만 여섯 개다. 눈 위로 자동차 3대가 지나간 것이다. 바큇자국이 4개는 같은 자국이니까 한 대가 왔다가 돌아간 것이고, 다른 한 대는 지나간 것이다. 눈 내리고 이 길에는 자동차 2대가 다닌 것이다. 아직 다른 발자국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내 발자국만 남기고 걸어가고 있다. 걸어가는 발자국 모두가 눈 위를 처음 밝으면서, 가끔 뒤돌아보며 남겨진 발자국이 반듯하게 찍혔는지 확인도 하면서 걸어간다.
과수원을 지나 개울가 도로를 따라 걸어가고 있다. 개울가에 언 얼음 위에는 눈들이 덮여 있고, 개울가 가장자리 푸른 풀잎 위에는 눈과 서리가 서려서 하얀 잎이 되어 있다. 다음 동네가 보이는 곳까지 올라왔지만 아직도 아무도 보이지 않고 눈 내린 하얀 지붕만 보인다.
눈이 오는 날 눈 덮인 지붕 옆 꿀 둑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부지런한 집주인이 마당의 눈을 쓰는 평화로운 모습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풍경이지만, 그냥 조용한 하얀 지붕만 보인다. 움직이지 않는 하얀 풍경 속에 한집에 연기가 오른다. 아마도 그 집은 나무로 난방을 하기에 이 아침에 나무를 넣고 있을 것이다. 그 연기가 일직선으로 올라가는 모습이 조용하고 한적한 동네 분위기 속에 그 집에 눈길을 가게 한다.
오랫동안 한적한 눈 내린 길을 혼자서 걷다가 다시 돌아온다.
돌아오는 길도 아직 자동차 바큇자국은 6개뿐이고 사람 발자국이나 다른 발자국도 없이 올라간 내 발자국을 따라 내려온다. 한참을 내려오다가 왔던 길에서 옆으로 빠져 샛길인 들길로 걸어간다. 고개 숙이고 익어 가던 벼들도 이젠 그루만 남았고, 붉게 익어서 탐스럽던 사과도 모두 걷이가 끝나고 앙상한 가지 위에 눈들이 살짝 내려앉아 있다. 빨 갖게 다렸던 고추나무도 이제는 모두 뽑혀 나갔고, 늦게까지 추수를 하지 않던 콩밭도 이제는 깨끗하게 베어지고 간간이 탈곡된 콩 껍질만 보인다. 그렇게 푸르게 자라던 곡식들도 사계절이 지나고 처음 시작할 때의 모습으로 돌아간 들판이다.
논밭 따라 나 있는 샛길도 하얀 눈으로 덮여 있다. 샛길에는 들고양이 발자국이 나 있다. 비뚤어지지 않고 일직선으로 걸어간 발자국이다. 나도 그 자국을 옆으로 하고 나란히 발자국을 남겨 본다. 한참을 가도 끝이 없이 들고양이 발자국이 가고 있다. 이른 아침에 먹이 찾아 나왔는지, 친구 찾아 마실 나왔는지 끝없이 이어져 있다. 끝나는 곳이 궁금해서 계속 따라가 본다. 그러면서 뒤돌아보며 고양이 발자국처럼 일직선으로 걸으려고 애쓰지만, 내 발자국은 비뚤어진다. 고양이 발자국이 끝없이 앞서갈 것 같았는데 한참을 오니까 또 다른 작은 길로 올라가는 것이다. 그곳으로 따라갈 마음은 없어서 곧장 샛길을 걷는다.
다시 아무도 가지 않은 눈길이다. 한참을 하얀 눈길을 걸어간다. 고요하고 조용한 길이다. 눈 위에는 더 이상 아무런 표시도 없이 하얀 길이다.
아직도 도로에는 사람 발자국이나 지나가는 차들도 없이 보이는 들판은 모두 멈춰 있는 듯 움직이는 것은 없다. 다시 돌아온 동네에는 몇 집에서 연기가 올라간다. 이제 아침을 시작하는 것이다. 바람 없는 고요한 아침 연기는 뽀얏게 일직선으로 올라가서 점점 옅어진다.
남산에는 눈 온 뒤라서 한없이 푸른 하늘과 산이 맞닿아 있다. 그 산 너머로 붉은빛이 짙어져 오는 것이 아침 해가 올라오고 있는 것이다. 첫눈이 온 길을 걸으면서 새로운 마음이나 한없이 동심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갖고 싶지만, 이제는 첫눈이 봐도 설레는 마음이나 무엇을 바라는 것도 없이 한 해가 저물어 간다는 생각이 앞선다. 집안에 들어오니까 따뜻한 온기가 느끼면서 따뜻한 것이 편안함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