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에서 만나자
1화 보고 오기
“너, 내가 물건이야?”
1시간 만이었다. 호정이 아무리 사과하고 설득하고 침묵하고 화를 내도 내내 얼음처럼 앉아있던 다정이 입을 연 건.
“아니, 사람인데?” 1시간 동안 죄책감이 증발해 버린 호정은 놀리듯 가볍게 대답했다. 잘못은 했지만, 아니 솔직히 말하면 잘못까지는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다정을 생각해서 사과하러 왔는데 수험생의 피 같은 1시간을 이런 식으로 뺏다니,라는 생각에 화도 조금 났다.
“흐흑…!” 다정이 울기 시작했다.
“아,씨…” 호정은 당황한 나머지 욕을 내뱉었다. 호정에게 감정은 번거로운 존재였다. 호정이 다루는 모든 것엔 정갈한 정육면체 모양의 정답이 존재했는데, 감정이 끼어들면 그 위에 먼지가 앉고 안개가 껴서 오염된다고 여겼다. 정답이 한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건 호정에게 심장을 꺼내서 긁고 싶을 정도로 답답한 상황이었다.
“울지 말고 똑바로 말해.” 호정이 엄격한 아버지가 어린 딸을 혼내듯 말했다. “기분 나쁜 걸 말로 제대로 하라고.”
“너 진짜 소시오패스니? 네가 나한테 어떤 상처를 줬는지 진짜 몰라?”
“어, 모르겠어. 솔직히 내 계획대로 돼서 나쁠 거 없잖아?”
“무슨 계획? 그냥 나만 두고 다 떠나고 싶은 거잖아!”
“언니 스물아홉 살이야. 떠나긴 뭘 떠나. 이쯤 되면 다 각자 알아서 사는 거지! 그렇게 수동적으로밖에 말 못 해?!”
호정은 늘 이 점이 답답했다. 아무리 동갑 쌍둥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다정이가 언니인데. 다정에게서 언니 같은 면은 눈알을 꺼내 벅벅 씻어봐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부는 바람에 속절없이 날리는 깃털처럼 약하디 약한 언니를 보며 호정은 늘 나라도 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언니가 언니 다웠어 봐. 내가 이렇게까지 했나!”
“내가 동생 같아서 무슨 짐짝 넘기듯 결혼시키려고 했어? 너 혼자 조선시대니 지금?”
“언니 원래 남자 환장하잖아.”
아, 방금 건 좀 실수였다. 호정이 말을 회수할까 망설이는 찰나 다정의 표정이 순식간에 차갑게 변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마치 먹이를 노리는 사자처럼 천천히 아주 천천히 호정에게 다가갔다.
“그래, 넌 나를 항상 우습게 봐.” 다정은 분명 분노하고 있었다. 그러나 평소보다 훨씬 느리고 차분하게 말했다. “언제나 네 생각이 정답이고 따르지 않으면 멍청하다고 생각하지.” 다정이 호정의 눈을 빤히 응시했다. 동공 너머까지 꿰뚫어 보듯이.
달라진 다정의 태도 때문일까, 호정은 순간 느껴지는 서늘함에 손으로 목을 감쌌다.
“그런 건 그저 통제욕구에 절여진 오만일 뿐이야.”
호정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더 있다가는 영원히 낫지 않을 상처를 받을 것만 같았다.
“나중에 얘기해.”
다정이 나가려는 호정의 손목을 단호하게 잡았다. “원하는 대로 네 잘못 똑바로 말해 줄게.”
“이거 놔!”
“미련하게 5년씩이나 잡고 있는 그 시험.”
호정의 심장이 쿵 떨어졌다.
“네가 어떻게 노무사가 돼? 현실적으로.”
갑자기 다정의 음성이 미묘하게 호정의 목소리와 닮아졌다. 호정이 고개를 들어 쳐다보자 다정은 그제야 손목을 놔주었다. 그리곤 팔짱을 끼고 기고만장한 표정으로 호정을 내려다봤다.
“머리 팽팽 돌아가는 20대 초반들, 아니면 인사팀 경험 있는 30대들이 바글바글한 그 수험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아? ...네가?“
호정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다정이 그걸 캐치한 듯 더 몰아붙였다.
“2년이면 된다고 하지 않았나?”
“나 처음 시작했을 때랑 지금이랑 많이 달라.” 호정이 떨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며 반박했다. “한 해에 지원자가 2500명씩은 늘어나고 있…” “그러니까.”
말허리가 잘린 채 황당하게 서 있는 호정을 보며 다정이 다시 한번 힘주어 말했다.
“그러니까.“
다정이 하찮다는 듯 눈으로 호정을 가리켰다. 호정을 바라볼 때마다 상냥하게 올라가던 다정의 두 입꼬리가 이젠 너에겐 아깝다는 듯 한쪽만 올라가 있었다.
호정이 처음 보는 다정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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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다음화에서 만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