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쓰는 편지
언제부터인가 너에게 나를 설명하는 일이 버겁고 귀찮게 느껴졌어. 말해봤자 다 전해지지 않을 것 같았고,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괜찮을 거라 생각했지. 그런데 지금 돌이켜보면, 아마 그게 우리가 멀어진 이유였던 것 같아. 이제야 말할 마음의 여유가 생겨서, 이렇게 글을 쓰고 있어.
합평을 하는 중에 누가 연락을 해오면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애매할 때가 많았어. 처음엔 ‘합평 중이야’라고 했다가, ‘오늘 글쓰기 모임이 있어서’라고 바꿨다가, 나중엔 그냥 ‘수업 중’이라고 보내기도 했지. 그런데 그 ‘수업’이 뭔지, 내가 누구와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너에게 말해본 적이 없더라. 아무튼… 미안해. 네가 궁금해했을 그 많은 순간들에 아무 말도 못 했던 내가.
사실은 나도 너 보고 싶었고, 연락하고 싶었던 순간이 꽤 많았어. 근데 그게, 글쎄… 이상하게 손가락이 안 움직이더라. 마음은 ‘보고 싶다’고 하는데, 손은 갑자기 커피를 내리고 청소를 하고… 그렇게 바쁜 척하느라 진짜 바빠졌달까?
그래도 이쯤 되면 거의 생활 밀착형 자기 합리화 장인이니까, 너도 그려러니 하려나.
그때는 몰랐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네가 내 마음 밖에 있었던 게 아니라, 너무 안쪽 깊숙이 있어서 말이 안 닿았던 것 같아.
언제나 바쁜 척만 했던 나에 대해서 말하고 싶어졌어. 사실 그 바쁨이 진짜 일정 때문이었는지, 마음속에 혼자 북적이는 생각들 때문이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 지금 생각하면, 바빠서 애쓴 게 아니라 그냥 진짜 정신없었던 걸지도 몰라. 말 걸면 무너질 것 같아서 괜히 더 센 척, 바쁜 척했나 봐.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좀 웃겨. 그때는 그게 최선인 줄 알았어. 바쁘고 더 지친 척 했던 것 같아. 실은 한가하면서 말이야. 요즘은 누군가를 만나는게 왜 이렇게 쉽지 않은지. 그러면서 글쓰기 수업이나 합평 모임에는 최대한 안빠지려고 노력해. 어딘가 지적인 향기 풀풀 풍기는 공간에서 문학과 사유의 깊이를 나누는 시간을 쓰는 일에는 너그러워져. 내 글을 내세워 “여긴 좀 억지스러워요”, “이 문장은 너무 멋 부린 것 같지 않아요?” 하며 웃고 떠드는 시간이었는데 말이지. 그래도 그 순간만큼은 나도 괜히 ‘지성인’ 흉내를 내며 진지한 척, 바쁜 척… 뭐랄까, 나름 문학하는 사람 느낌을 풍기고 싶었던 거야. 너도 알지, 나의 오랜 꿈이자 로망이 작가가 되는 되는 거잖아. 그곳에서 새침한 척 표정을 하고 있을 나를 생각하면 좀 웃기지 않니?
합평에 대해 간단히 말하면, 글을 함께 읽고 서로 비평하는 자리야. 한 사람이 쓴 글을 다 같이 읽고, 감동하거나, 조언을 주거나, 각자의 생각을 나눠. 거기에는 저마다의 삶의 방식이 담겨 있고, 다양한 사람들의 시선과 목소리가 있어. 글 속 인물들은 대부분 모순적인 면을 하나쯤은 지니고 있어. 그런 모순을 통해 우리는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돼. 이 모임은 나에게 접점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이고, 그걸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씩 달라지는 걸 느껴. 누구는 어디에 집을 샀고, 어떤 차를 타고, 무슨 브랜드를 입고 다니는지, 또 지금은 어느 동네에 사는지를 이야기하는 그런 일상에서 잠시 벗어난 기분이 들기도 해. 아이러니하게도, 그 이야기 속에는 여전히 사랑받고 싶어 하는 마음, 인정받고 싶은 욕망, 누군가보다 나아지고 싶은 감정들이 가득하지만. 그래도 그걸 바라보는 나는 어딘가 조금 멀어진 자리에서, 지금의 번뇌에서 비켜나 있는 느낌을 받아.
모순된 모습을 보다 보면, 우리가 얼마나 복잡한 마음으로 살아가는지 다시 생각하게 돼.
같은 글을 읽고도 각자 느끼는 게 다를 때, 사람마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다르다는 걸 실감해.
그렇게 가치관을 엿보기도 해.
어떤 글에는 자연스럽게 공감이 되면서 재미도 느끼고, 또 어떤 글은 도무지 마음이 닿지 않아 한참을 멈춰 읽게 돼. 그럴 땐 이해하고 싶은데 쉽사리 다가가 지지 않는 마음 앞에 오래 머물게 돼. 왜 그런 감정을 느꼈을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답을 찾듯 천천히 다시 읽어보게 되는 거야. 마치 우리 사이에 안 보이는 미묘한 갈등을 더듬어보는 것처럼. 덕분에 내 생각의 한계, 마음의 깊이를 가늠해보기도 해. ‘나라면 어땠을까’ 하고. 익숙한 상황이라면 예측 가능한 반응이 떠오르지만, 낯설고 전혀 다른 환경에 놓인 나를 상상하면 그건 또 다른 이야기거든.
한편 합평은 일종의 마감 역할을 하기도 해. 물론 깊게 읽고 탐구하는 독서 모임도 충분하지만, 나는 글쓰기가 제일 하고 싶은 거야. 더 정확히는, 내가 쓴 글을 보여주고 싶은 욕구가 큰 것 같아. 모두가 비슷한 이유로 모인 곳이라서 합평에 참여하려면 나 역시 내 글을 제출해야 해. 그게 제일 어려운 부분이지. 웃기게도 합평에 참여하는 건 단지 글을 쓰기 위해서 기도 해. “쓰고 싶으면 그냥 쓰면 될 텐데”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우리도 잘 알잖아. 무엇보다 자신과의 약속은 제일 쉽게 타협되기 마련이거든.
내 마음은 언제나 글을 쓰고 있어. 어떤 때는 꼭 써야 한다는 의무감에, 또 어떤 때는 쓰고 싶다는 열망에 밀려 글을 쓰려고 해. 그런데 현실은 다르지. 침대 위에서 나른한 자태를 뽐내는 고양이를 보면 나도 그 옆에 눕고 싶은 유혹을 느껴. 그래서 나는 집의 편안함 대신, 카페에서 글을 쓰곤 해. 집에서는 눕고 싶은 유혹을 이기기 어렵거든. 나는 나와 상관없는 장소에서 비로소 자유로워지는 기분을 느낄 때가 있어. 그곳에서는 일상 속의 쪼잔한 부분에 얽매이지 않고, 오로지 내 생각과 마음에 집중할 수 있게 돼.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선택이 아니라,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뭔지 들여다보게 되는 거야. 그 순간만큼은 마치 내가 세속적인 것들로부터 한 발짝 떨어져,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고도 나, 그자체로도 충분한 사람처럼 느껴져.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선택이 아니라,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뭔지 들여다보는 삶 말이야. 꼭 그런 삶을 살고 있지 않더라도, 그 가능성을 떠올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로가 되기도 해.
합평 하는 날이 다가오면, 글을 완성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자연스레 글쓰기에 몰두하게 돼. 물론 압박감에 겨우 쓴 글이 때론 수치심을 동반하기도 하지만, 그때의 선택이 최선이었다고 믿어. 합평을 통해 내 글의 장단점을 파악하고, 특히 부족한 부분은 반드시 메모해두지 않으면 금세 잊히더라고.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참고해 퇴고를 계획하지만, 근사한 글을 완성하기 위한 과정은 늘 멀고 험한 길이야. 합평은 결국 단순한 평가를 넘어, 글 쓰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줘. 품평이나 평가는 나중 문제지. 그런 점에서 합평은 때론 나를 고달프게 하는 함정이지만, 그 안에서 나는 매번 나를 밀어주는 무언가를 발견하게 돼. 내 안의 또 다른 나. 각자가 추구하는 방식으로 우리의 관계는 소중하다고. 그리고 네가 날 좋아한다 것. 그런 것 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