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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리지엥 Sep 20. 2021

코로나 이후 다시 프랑스 -역사

바이킹족이 세느강을 타고 파리 중심부까지 침략했다고?

  루브르 박물관은 외적의 침략을 막기 위한 군사적 요새에서 세계 최고의 박물관으로 변모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로부터 파리와 시떼섬을 방어하기 위해서 필립 오귀스트 국왕은 중세 시대에 군사적 요새 역할을 하는 성곽을 쌓았던 것일까? 중세 당시 프랑스의 골칫거리 중 하나는 바로 악명높은 해적들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파리는 프랑스 내륙 깊은 곳에 있고 바다와 멀리 떨어져 있어서 해적과는 거리가 멀 것 같은데 무슨 해적들이 파리를 공격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것이다. 

  일반적으로 해적들은 배를 타고 바다를 이용해서 바닷가 마을이나 도시들을 공격하는 게 정상적인데 파리 한복판까지 해적들이 들어왔다는 것은 쉽게 이해가 안 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11세기~12세기 당시 많은 해적들이 프랑스 해안지방은 물론이고 내륙 깊숙한 파리까지 들어와서 약탈과 노략질을 많이 벌였던 것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이들 해적들은 누구였을까? 이 해적들은 누구였고 어떻게 파리까지 공격할 수 있었을까? 이들은 바로 북유럽에서부터 악명을 떨쳤던 해적들의 대명사인 바이킹족들이었다.

   바로 이들 바이킹족들이 프랑스 북부 지방(지금의 노르망디 지역)의 해안지방을 약탈하고 이어서 파리 중심부까지 이어져 있는 세느강을 타고 특이하게 생긴 자신들의 배를 이용해서 파리까지 들어왔었던 것이다. 마치 강원도에서 발원한 강을 타고 북한강과 한강을 타고 서울 한복판까지 들어올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지금의 프랑스 북부지역인 노르망디 지역을 통해서 프랑스 내륙으로 바이킹족들이 들어왔는데, 프랑스어 노르망디 Normandie는 북쪽 사람 혹은 북유럽인, 즉 노르만 사람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노르망디라는 이름은 9세기 이후, 노르웨이, 덴마크 지역의 바이킹족이 지금의 노르망디 지역인 프랑스 북부지역에 정착하면서 생긴 것이다. 그래서 그 쪽 지역 이름이 아예 노르망디 공국으로 불렸던 것이다. 

   그렇다 바로 1944년 6월 6일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결정적 계기였던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벌었던 바로 그곳이었다. 이처럼 프랑스 북부 지역인 노르망디는 연합군들만 상륙했던 것이 아니고 중세에는 해적들의 대명사인 바이킹족들도 상륙했었던 것이다.  

   원래 루브르 박물관 건물은 1190년에 당시 국왕이었던 필립 오귀스트의 왕명에 의해 프랑스 북쪽 지방인 노르망디로부터 세느강을 타고 파리 중심부까지 들어와서 약탈과 노략질을 하던 바이킹족의 침입을 대비한 세느강 변의 성벽으로 건설되었던 것이다. 바다에서 해적질로 유명했던 바이킹족들이 배를 타고 세느강 한복판까지 들어왔다고 하면 선뜻 이해가 잘 안 갈수도 있지만 세느강이 북쪽 바다까지 연결된 것을 상상하면 이해가 될 것이다. 즉 바이킹족들은 자신들이 만든 선박을 타고 노르웨이가 있는 북유럽에서 출발해서 도버해협을 건너 영국은 물론이고 세느강을 이용해서 파리 중심부까지 쉽게 도달했던 게 당시 중세의 상황이었다. 

   중세 시대 당시에 바이킹족이 파리를 포위하고 공격할 때 동원됐던 바이킹족 해적들의 수는 무려 4만 명에 육박했고 그들이 타고 온 배는 700척이 넘었다고 전해진다. 이처럼 엄청난 군사들을 동원한 바이킹족은 무려 7개월이 넘는 기간 동안 파리를 포위하고 공격을 퍼부었던 것이다. 

이처럼 해적질로 악명높았던 바이킹족들을 맞아서 당시 파리를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은 파리 시민들과 왕실의 적극적인 도움도 있었지만 더욱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바로 루브르 박물관(당시는 루브르 성곽)의 튼튼한 방벽이 크게 한 몫을 했던 것이다. 이 튼튼한 루브르 성곽으로 인해 4만명 이상과 700척 이상의 배가 동원된 바이킹 해적들의 군사력도 결국 파리를 함락시키지 못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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