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표범을 만나다
2018.08.13.(월)
하나우마 베이(Hanauma Bay) - 부스 앤 키모스 홈스타일 키친(Boots & Kimos Homestyle Kitchen), 크레페 노 카 오이(Crepes No Ka’Oi) - 카일루아 비치 파크(Kailua Beach Park) - 라니카이 비치(Lanikai Beach)
하나우마 베이는 오아후 최고의 스노클링 비치로 통한다. 7시 전에 도착해야 입장료가 무료이고, 물이 탁해지기 전에 아침 일찍 도착해야 물고기를 잘 볼 수 있다고 했다. 아침 일찍! 비치의 왼쪽! 이 포인트였다. 전날 온 가족이 너무 늦게 잠들어서 아이들을 새벽부터 깨워서 7시 전에 가느냐, 물고기를 좀 못 봐도 느긋하게 푹 자고 가느냐를 고민하다가 좀 무리를 해서라도 일찍 가기로 했다. 같은 고민을 하다가 새벽에 무리해서 갔는데 그러길 너무 잘했다는 블로거 글을 봐서였다. 간단히 때울 아침밥을 전날 사두려고 했는데 장을 못 봐서 새벽에 일어나 밥을 안치고 미소된장국, 계란, 소시지를 준비했다. 이게 패착이었다. 남편 말대로 눈곱도 안 떼고, 가는 길에 무스비를 테이크 아웃하는 단순한 일정을 선택했어야 했다. 애들은 최대한 오래 재우고, 아침밥도 먹이고, 맑은 물에서 물고기도 보고 싶은 욕심 중 적어도 하나는 포기했어야 했다. 출발이 늦어지면서 남편은 과속을 했다. 램프를 놓쳐 돌아가느라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 이미 6시 58분이었다. 짐은 내가 챙겨가기로 하고 세 남자만 먼저 7시 전 무료입장을 노리고 백 미터 달리기를 했다. 스노클링 짐을 혼자 매고 낑낑대며 매표소 쪽에 가보니 세 남자의 표정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물어볼 것도 없었다. 공짜표는 날아갔고 시작도 하기 전에 피곤했다.
입장권을 끊고 내려가기 전에 자연보호와 관련된 동영상을 봤다. 하나우마 베이에서는 산호를 보호하기 위해서 옥시벤존과 옥티노세이트가 들어가는 선크림은 금지였다. 매일 쓰는 선크림이 산호에게, 바다에게 치명적일 수 있다는 게 충격이었고, 섬세한 산호를 보호하기 위한 섬세한 규제가 가슴에 남았다. 동영상을 보고 난 후 꽤 긴 거리를 내려갔다. 좋은 스노클링 포인트라는 왼쪽으로 서둘러 갔지만 그늘이 조금이라도 있는 곳은 이미 다 주인이 있었다. 우리는 땡볕에 비치타월을 폈다. 물은 차가웠다. 동영상에서 강조한 대로 산호를 안 밟고 스노클링을 하기가 굉장히 어려웠다. 누군가가 산호를 오래 밟고 서 있거나 산호 가운데로 가면 방송이 계속 나왔다. 빅아일랜드가 내 눈을 너무 높여놨나보다. 물고기들이 생각보다 다양하지 않았고 많지도 않았다. 남편이 저쪽에 많이 있다고 손을 잡고 이끄는 곳은 애들을 데리고 가기엔 위험했다.
그때 무지개 물고기가 보였다. 한 번 보고 오묘한 빛깔이 너무 이뻐서 ‘무지개 물고기’라고 이름 붙여준 패럿 피시, 마이 페이버릿 하와이안 피시이다. 빅아일랜드에서 만난 적이 두 번 있지만 이번이 내가 본 무지개 물고기 중에서 제일 컸다. 그 아이를 계속 따라다녔다. 깊지 않은 곳에서 시간을 두고 같이 놀 수 있었다. 수십 장의 사진을 찍었다. 피곤과 미안함과 짜증으로 시작한 하나우마 베이가 무지개 물고기를 만나면서 재밌어지기 시작했다.
사실 입장료도 4인 가족이니 입장료*4라고 생각했었는데 남편이 똥꼬1호, 2호는 무료여서 15달러만 냈다고 했다. 이 가격인 줄 알았으면 7시 맞추려고 그렇게 아등바등할 게 아니었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생각했던 가격의 반밖에 안돼서 나는 금세 이게 웬 횡재냐 싶었다.
난 하와이에 와서 돌고래, 거북이와 수영을 했다. 나의 동물 버킷리스트는 이게 끝이었는데 이 날 하나를 더 선물 받았다. 하와이 카페에서 하나우마 베이에서 운이 좋으면 몽크실(바다표범)을 볼 수도 있다는 글을 봤다. 나는 내 행운을 이미 다 쓴 느낌이라서 감히 몽크실을 꿈꾸지는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몽크실까지 보면 너무 행복하겠어요. 근데 이것까지 욕심내긴 그렇죠? 양심이 있지.
이런 기분이었다.
일본인 단체관광객들이 팀을 이뤄 가이드와 함께 스노클링을 하고 있었는데 일본인 팀이 있는 곳을 따라가면 이쁜 물고기들이 바글바글했다. 춥고 배고픈 똥꼬1호, 2호는 모래놀이를 하면서 쉬기로 하고 나는 일본인팀에게 너무 가까이는 가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졸졸 따라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일본인 팀이 일제히 한 곳을 가리키며 탄성을 질렀다. 그곳에 몽크실이 있었다. 깜짝 놀라서 나는 탄성이 아니라 고함을 지르고 말았다. “꺄악, 1호야! 2호야!.” 내 소리에 일본인들이 일제히 소리 지르지 말라고 쉿 표시를 했다. 몽크실은 너무 신기하고 경이로웠다. 이걸 나 혼자만 볼 수는 없었다. 큰 소리로 아이들을 부를 수가 없으니 물살을 헤치고 아이들을 찾아 나갔다. 몽크실이 갔을까 봐 조마조마해 하면서 모래놀이하고 있는 애들을 데리고 왔다. 다행히 몽크실이 아직 햇빛을 즐기고 있었다.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다른 사람들이 잘 몰라서 아까 일본인들 말고는 사람들이 없었다. 안되는 줄 알면서도 매끄러운 피부를 딱 한 번만 만져보고 싶었다.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지만 일본인팀이 떨어져 있는 거리만큼의 거리를 지켜주는 게 암묵적인 법인 듯했다. 일본인들은 내가 조금만 움직여도 “He'll go away.(가버릴 거예요)"라며 더 긴 쉬잇~을 했다. 그래서 더 오래 몽크실과 함께 있기 위해 침묵을 지켰다.
문제는 남편이었다. 남편도 봐야 하는데 스노클링을 하러 멀리 나가서 보이지도 않는다. '아빠~'하고 소리를 지를 수도 없었다. 찾기를 포기하고 몽크실 사진을 찍어서 보여주기로 했다. 몽크실과 수영도 해보고 싶었으나 몽크실은 너무 빨라서 쫓아갈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그렇게 한 20분을 찰칵 사진 소리도 크게 느껴질 정도의 고요함 속에서 몽크실을 관찰했다. 쌍꺼풀 있는 처진 눈, 초록 이끼 낀 흰 수염... 볼수록 매력있다. 덩치는 산 만한데 표정이 완전 아기같다.
몸에 새겨진 N2표시는 보기엔 안 좋아 보였지만 누군가 이름을 붙여주고 보호해주기 위한 게 아닌가 싶었다. 우리가 1000마리 정도 남아있는 멸종위기종을 본 것이었다는 건 나중에 알았다.
이로써 나의 하와이 동물사전이 완벽하게 채워졌다. 몽크실을 보내고 한참 있다가 남편을 만났다. 흥분해서 몽크실을 봤다고 얘기했는데 ‘에이 뻥치지 마’하다가 사진을 보더니 자기를 왜 안 불렀냐며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나도 같이 못 봐서 아쉬웠다.
시작도 하기 전에 피곤하고 내 뜻대로 되지 않아 일진이 안 좋은 날이라고 생각했는데 무지개 물고기를 만나고 몽크실까지 만났다. 피곤함이 싹 날아갔다. 땡볕이라 맘에 안 들었던 우리 자리는 추운 몸을 녹이기에 딱 좋았다. 하나우마 베이로 내려가는 길에는 빨리! 왼쪽! 하느라고 보지도 못했던 풍경이 올라오는 길에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몇 번을 길을 막고 사진을 찍었다. 다 산호 밭인데 어찌 산호를 안 밟고 스노클링을 할 수 있을까 싶었던 애물단지 산호들이 더 높이 떠오른 태양 때문인지 밝아진 마음 때문인지 선명하게 드러났다. 군락을 이룬 산호들이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니 세계지도 같았다. 우리가 저기서 놀았던 거구나. 다 산호밖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넓은 공간이 있었구나. 보물찾기 하듯이 산호 지도를 들고 산호 둘레를 돌며 탐색하는 것도 재밌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가 공항의 전광판 화면을 가득 채운, 하와이 관광 책자에 나온 그곳이었구나를 그때서야 알았다.
짜증 나고 피곤한 마음에는 아무것도 안 보인다. 그런데 짜증과 피곤으로 시작한 하루가 나도 모르는 새 거저 주어지는 행운을 만나 회복되기도 한다. 내가 마음을 먹어서가 아니었다. 무지개 물고기가 나타났고, 바다표범이 나타났다.
이날 오후의 이야기는 하와이 Day 16, PM 편에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