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비
2018.8.15.(수)
헤븐리(Heavenly) - 로스(Ross) -쿠알로아 랜치(Kualoa Ranch) 정글체험 – 카야 스토어(Kaya’s store) -폴리네시안 센터(Polynesian Cultural Center)
오늘은 조식다운 조식을 먹기로 했다. 여행하면 호텔이고 호텔 하면 조식인데 하와이에서는 조식이 포함된 호텔이 거의 없었다. 분위기 좋은 곳에 가서 브런치를 먹고 싶었다. 음식에 대한 어휘라면 영어, 중국어, 태국어, 이탈리아어 할 것 없이 섭렵하고 있는 미식가 남편이 고르고 골라 헤븐리로 가기로 했다. 로스에 차를 댔다. 헤븐리에서 가깝고 물건을 하나라도 사기만 하면 무료주차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오아후에 와서 한 번도 화장실을 가지 못한 배가 살살 아파 왔다. 한국에서는 새벽에 일어나서 모닝커피를 한 잔 하고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다 보면 쾌변도 아침 일과 중의 하나였다. 하와이에 와서는 고요한 시간이 없었고, 믹스 커피 한 잔 할 시간도 없었으며 아침에 허둥지둥 일정을 시작하느라 바빠서 화장실 갈 생각을 못했던 것 같다. 로스에서 조용히 해결하기로 하고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아 세 남자를 먼저 보냈다. 그런데 아무래도 마음이 급했는지 배만 아프고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시계만 계속 보다가 포기하고 구글맵을 켜고 헤븐리를 찾아갔다. 하와이에서 처음으로 내 폰으로 구글맵을 켜고 내가 ‘해석’해서 길을 찾아갔다. 남편을 졸졸 따라다니기만 했었는데 짧은 거리를 헤매다 멀리 돌아오면서 길눈 밝은 남편한테 다시 한번 고마움을 느꼈다.
남편이 미리 주문을 해놓았다. 새가 날아다니는 야외 테라스에 꽃처럼 이쁜 조식이 펼쳐져 있었다. 내 거 먹지 말라고 휘휘 내쫓아야 하는 새가 아니라 짹짹 음악을 연주하는 관현악단 새였다. 오믈렛, 믹스베리 프렌치토스트, 깔루아피그 에그 베네딕트, 마우이 커피가 환상적인 비주얼을 자랑하며 곱게 차려져 있었다. 하지만 나는 배가 아파서 도무지 먹을 수가 없었고 다시 헤븐리 화장실을 찾았다. 쓸 수 있는 화장실이 한 칸 밖에 없었고 기다리는 사람이 많아서 쾅쾅 노크 소리가 두 번째 났을 때 포기하고 나왔다.
정말 맛있었는지 그 이쁘던 음식들이 내 몫만 남기고 벌써 없어져있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음미할 수 없는 상태였지만 조식 메뉴들이 나의 장 활성화를 도울 거라는 지푸라기 같은 희망을 가지고 꾸역꾸역 먹었다. 커피를 사발로 마셔도 이번엔 장이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남편이 이번 여행 후기를 하와이 카페에 남기면서 유일하게 따로 포스팅한 식당이 헤븐리였다. 나는 그 후기를 읽고 악플을 달 뻔했다. 우리가 먹었던 메뉴와 사진과 주차정보까지 담긴 내가 봐도 매력적인 헤븐리 리뷰글은 ‘가족 모두가 만족한 맛집이었습니다.’로 마무리되어 있었다. 오 마이 갓! 아내가 사경을 헤맬 때 당신은 어디 있었소? 그리도 맛있었단 말이오?
하긴, ‘화장실이 붐비는 것이 단점입니다.’라든지, ‘아내는 변비였습니다.’라고 쓸 수는 없다. 푸하하.
그래도 억울해서 안 되겠다. 장을 비우고 다시 가야겠다. 하와이를 다시 가야 할 이유가 또 하나 생겼다.
다시 로스로 와서 주차비를 아끼기 위한 쇼핑을 했다. 남편이 검정색 나이키 운동화를 득템하는 동안 나는 로스 매장만큼이나 넓고 여유로운 로스 화장실로 다시 들어갔지만 또 실패했다. 그리고 눈 여겨두었던 우산 하나를 골랐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 우산이 하와이에서 쇼핑한 나의 유일한 물건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배에 돌덩이를 매단 채로 쿠알로아 랜치로 이동했다. 쿠알로아 랜치는 쥬라기 공원, 첫키스만 50번째, 진주만 등의 영화 촬영지로 유명하다. ATV, 영화촬영지, 시크릿 아일랜드, 정글투어 4가지 상품 중에 고민을 많이 했는데 우리는 지프차를 타고 영화 촬영지를 둘러보는 ‘정글투어’ 프로그램을 선택했다. 가이드가 설명하는 영어를 알아듣지 못하면 애들은 재미가 없을 거라는 얘기를 많이 들어서 여행 떠나기 하루 전날 영화 쥬라기 공원을 벼락치기하듯이 온 가족이 보고 왔다. 영어를 못 알아들어서 답답해도 자연을 보고 감탄하길, 쥬라기 공원에서 나온 장면을 보고 반가워하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입이 쩍 벌어지는 웅장한 산이 등장했다. 눈을 한참 들어 올려야 꼭대기에 시선이 닿는, 쭉쭉 뻗어 골짜기를 낸 산이 늠름함을 뽐내고 있었다. 이곳에 들어오면 어디서 어떻게 사진을 찍어도 이 산 때문에 영화의 한 장면이 된다. 세트장을 잘 꾸며놓은 영화촬영장이 아니라 자연 그대로가 너무 멋진 영화 촬영장이었다. 뱃속의 돌덩어리를 잠시 잊을 수 있을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창이 없고 지붕이 천막인 지프차를 타고 오르막 내리막 산길을 놀이기구 타듯이 누볐다. 창이 없어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 손을 뻗어 시원한 바람을 만졌다.
바람에서 향기가 났다.
친절한 베스트 드라이버 선생님이 중간중간 차를 세우고 설명도 해주고, 사진도 찍어줬다. 쥬라기 공원 세트장 앞에서는 설명만 하고 돌아 나오는 줄 알았는데 그 문을 통과해서 들어갔다. 야호! 애들은 흥분해서 “어! 여기 어딘지 알겠다.” 하며 반가워했다. 드라이버 가이드 선생님이 차를 세워 딸기 같은 걸 따셨는데 스트로베리 진저라는 열매였다. 향수 이름 같다. 칼로 따서 즙을 손에 조금씩 짜주셨다. 샴푸처럼 쓰는 거라고 해서 머리에 쓰윽 발랐다.
드라이버 선생님과 마지막으로 차에서 사진을 한 장 같이 찍고 내리자마자 복통이 다시 시작되었다. 화장실이 기념품 가게 안에 있어 이 와중에도 귀걸이가 눈에 들어왔다. 돌고래 귀걸이에 반해버렸다. 나에게 돌고래는 하와이이자 자유이고 좀 더 비약하자면 꿈의 실현이었다. 그래서 돌고래 귀걸이를 하면 하와이를 내 몸에 지니고 다니는 기분일 것 같았다. 하지만 가격이 꽤 있었고 마지막 날 쇼핑할 때 더 이쁜 돌고래 귀걸이를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내려놓았다. 결국 나는 그 후로 돌고래 귀걸이를 발견하지 못한 채 한국으로 왔고 아직도 눈에 그 귀걸이가 아른거린다. 90프로를 세일한다는 명품지갑은 아쉽지 않은데 이 귀걸이는 두고두고 아쉽다. 애들이 조금 더 크면 쿠알로아 랜치에서 ATV(오프로드를 오토바이 타고 누리는 프로그램)를 꼭 해보고 싶다. 돌고래 귀걸이도 꼭 사고 말이다. 하하하.
이날 오후의 이야기는 하와이 Day 18, PM 편에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