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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일 Apr 02. 2022

언덕을 지나

파란만장했던 스무 살을 지나 어른의 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오던 스물한 살이 되던 해,



4.15 총선을 앞두고 지인의 소개로 투표 당일날 안내요원으로 일을 했었다. 초등학교 사회시간에 배웠던 모든 국민에게 주어지는 투표권을 태어나서 처음 행사하는 날인만큼, 나도 이제는 나라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겠다는 설레는 마음으로 전날 잠에 들었던 기억이 있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 왕십리에 위치한 모 초등학교를 가던 길에 경사진 언덕이 있어 속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안 오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오늘부로 진정한 어른이 되기로 했던 나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안내요원들이 모여 투표가 진행되는 절차를 듣고, 코로나 시기 이후 첫 투표인만큼 방역에 힘써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시는 소장님의 말씀이 끝나고 문 앞에 앉아 투표 시간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그날 유독 날씨가 따뜻해서인지 많은 사람들이 언덕을 지나 투표를 하러 왔으면 하는 마음으로 문 앞에 서있던 내가 스스로 기특했는지 아무도 모르게 셀카도 찍었던 스물한 살의 내가 떠오른다.



6시가 되기 30분 전인 5시 30분쯤, 저 멀리 정문을 지나 나이 드신 어르신 한 분께서 지팡이를 짚으며 걸어오셨다. 아직 아무도 오지 않은 시간에, 그것도 30분이나 일찍 홀로 언덕을 천천히 걸어 올라오셨을 생각에 달려가 부축해드리려 했으나 멀리서 손을 저으시며 괜찮다고 하시는 손짓에 다시 나는 자리로 돌아갔다. 문 앞으로 안내해드린 뒤 의자를 가져다 드리고 나니 멀리서 사람들이 이어서 한 두 명씩 언덕을 올라 정문을 지나 줄을 서기 시작했다. 거리를 두고 줄을 서실 수 있도록 안내해드리는데 점점 길어지는 줄을 보며 알게 모르게 긴장이 되기도 했었다.


그렇게 6시가 되고 투표가 시작이 되었다. 한 분 한분 차례대로 투표를 하실 수 있도록 안내를 하며 실수하지 않기 위해 몰두하고 있다 보니 내 뒤에서 누군가 등을 툭툭 건드리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저기,, 젊은 청년"


나를 부르는 듯한 목소리에 그제야 뒤를 돌아보니 그날 가장 일찍 오신 어르신이셨다. 무슨 일인지 여쭤보니 손자랑 나이도 비슷해 보이는 청년이 일찍부터 수고하는 것이 기특하고 또 친절히 안내해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으셨다고 한다. 별 일 아닌 일을 좋게 말씀해주시는 것이 부끄러워 붉어진 얼굴로 오히려 감사하다고 고개 숙여 인사드렸다. 덧붙여서 이른 새벽부터 경사진 언덕을 지나 투표하러 오시는 모습이 참으로 대단하신 것 같다고 말씀드리니, 이제는 어르신께서 웃으시며 손사래 치시고는 아니라고 하셨다. 가시는 길에 문을 열어드리며 인사를 드리고 다시 자리로 돌아가려던 찰나에 가시던 길을 멈추시더니 나를 부르시고 말씀하셨다.


"이보게 젊은이, 앞으로 나라를 잘 부탁하네"


어르신의 진심이 담긴 한마디에 순간적으로 많은 감정이 내 안에서 요동쳤다. 다시 자리로 돌아와 안내를 계속하는데 그 알 수 없던 감정들은 점차 커져갔지만 선명해지지는 않았다. 투표를 하고 돌아가시는 분들께 인사를 드리면 화답을 해주시는 모습을 보는데 한 가지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그 이른 새벽에 투표소로 발길을 하신 분들은 전부 어르신들이었다.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경사진 언덕을 올라 정문을 지나 투표로 하러 오신 분들이셨다. 돌아가시는 길에 인사드리는 내게 한 번씩 수고 많다고 등을 토닥여주시는데 그 감정이 조금은 더 선명해졌다.


책임감, 그리고 그로부터 오는 존경심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올해 대선이 치열한 접전 끝에 마무리되었다. 뉴스를 보다 화재로 집을 잃으신 마을 주민분들이 투표를 하기 위해 아침부터 먼 길을 가시는 모습이 보도가 되었을 때 몇 년 전의 기억이 다시금 떠올랐다.


지역별 사전 투표율이 역대 최고치를 경신했다고 한다. 특히 MZ세대를 포함한 2,30대의 젊은이들의 투표율이 높다는 소식이 반갑게 들리며 갈수록 깊어지는 기성세대와의 갈등이 이내 생각났고, 한 가지 질문이 떠올랐다.


자신의 의사표현이 확실하고 그것이 존중받기를 원하는 것이 MZ세대, 나와 젊은이들의 모습이다. 평등을 중요시하며 이전 세대로부터 내려오는 부조리에 맞서며 바람직한 태도를 가지고 더 나은 세상을 꿈꾼다. 부조리는 희생을 요구한다. 그렇게 요구된 희생은 없어져 마땅하지만, 희생 자체가 없이는 사회는 이상적인 모습을 갖출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젊은 세대가 당연하듯 외치는 공정과 존중 속에 남을 위한 희생은 전혀 없고 자신의 안위만을 위하는 이기심이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한다.


부조리한 희생조차 당연하듯 해오며 살아오다 보니 후세대들에게도 그것을 요구하는 어른들의 모습을 미워할 수 있다. MZ세대라는 표현이 생긴 것은 젊은이들의 이러한 반응을 포함한 여러 방면에서 생겨나는 다름을 존중하기 위함에서 오는 어른들의 노력이 아닐까 싶다. 젊은이들도 어른들의 부족함이 전해져 오지 않도록 막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희생과 노력을 먼저 바라보고 그 안에서 배려와 이해를 통한 조율이 이루어질 때 화합이 발생한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나 자신과 우리 세대에게 묻고 싶다


우리는 경사진 언덕을 오를 준비가 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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