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축복이야 Jun 03. 2024

좋음과 싫음 사이

함께 나눠요. 책. 20240603


5월의 마지막 날도 대학로 시집 서점 위트엔 시니컬에 갔습니다.

4월의 마지막 날처럼 난다의 북토크가 있었거든요.

<초록을 입고>의 오은 시인과 6월의 서효인 시인의 시간이었습니다.

올해 첫 달부터 매월 함께하다 보니 벌써 일 년의 절반이나 지났습니다.

이제는 뭔가 도장 깨기라도 하듯 매월 작가님들을 만나서 얘기를 듣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6월 3일인 오늘,

3 일자 에세이 '이토록 짠'을 읽고

바로 4 일자 에세이 ' 이렇게 명랑'도 읽었습니다.

그러다 울음이 터져 버렸습니다.

서효인 작가님은 이 책을 통해 처음 만나게 되었지만

아이를 키우는 부모라는 점에서 동질감이 느껴졌습니다.

부모임과 동시에 돌보아야 할 가족들이 있는 40대.

내 머릿속에는 늘 젊은 그 모습 그대로인데

나이로는 노인이라는 이름이 딱 맞는 부모님 생각에

결국, 울음이 터져 버렸습니다.

하늘이 이리도 맑고 맑은 날, 게다가 아침에 말입니다.


작가님의 글과 함께 6월이 가득 찰 것 같은 느낌입니다.



북토크에서 시를 낭독하셨는데 작가님만의 느낌이 있었습니다. 목소리와 분위기가 좋으시더라고요.




차와 침


믿기 힘들겠지만...... 특수학교 주차장에는 좋은 차가 꽤 많다. 외제차는 슬퍼 뵈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슬픔의 벤츠 슬픔의 비엠더블유...... 같은 건 우스꽝스럽지 않은가. 학생들이 파할 시간이다. 전철이나 버스에서는 쉬이 볼 수 없는 걸음걸이의 학생들이 한둘 운동장을 건넌다. 그는 손을 높이 들고 흔든다. 우리 아가, 우리 아가, 우리 아가...... 오늘은 친구들에게 침을 뱉지 않았니? 자동차보다 키가 큰 아가는 대답이 없고, 그는 자동차를 바꾸면 좀 덜 슬프려나 생각하기도 했었다. 과연 너는 오늘 침을 뱉지 않았는지? 아가가 대답 대신 침을 뱉었다. 외제차는 슬퍼 뵈지 않는다는 특장점이 있다. 전철과 버스를 탈 수 없는 아가를 차에 태우니 슬픔이 운동장 건너 썩 물러난다. 아가는 차창에 이마를 대고 입바람을 내고, 그는 핸들 중앙에 침을 뱉어버리고 싶은 걸 꾹 참고 와이퍼로 얼굴을 닦는다. 말갛게 없어진 그것들이 조만간 다시 나타날 게 분명함을 알았다. 닦인 슬픔에서 침 냄새가 났다. 믿기 어렵겠지만.




출판사 서평


난다의 시의적절, 그 여섯 번째 이야기!
시인 서효인이 매일매일 그러모은
6월의, 6월에 의한, 6월을 위한
단 한 권의 읽을거리

열두 명 시인의 열두 달 릴레이 ‘시의적절’ 시리즈의 여섯 번째는 서효인 시인의 『좋음과 싫음 사이』입니다. 6월은 한 해의 절반이기도 하지요. 인생의 중턱에서 올라온 길과 올라야 할 거리를 가늠하기에 참으로 시의적절한 때이기도 하고요. 삶은 언제나 와중입니다. 할 수 있는 것, 갈 수 있는 곳, 살 수 있는 삶…… 마냥 좋음으로도 그저 싫음으로도 내처 기울지 않는 법이니까요. 그런 삶의 순간들, 여느 때와 같은 고민과 누구나와 같은 푸념, 언제나와 같은 다짐으로 빼곡한 서효인 시인의 6월입니다. 그러니까 사람 사는 것 다 똑같구나, 그렇게 읽게도 됩니다. 저마다로 다르다는 점만큼은 똑같은 것이 우리의 삶, 그리하여 우리는 읽음으로 공감하고 이해하고 위안받을 수 있겠지요.

시인이자 편집자로, 삶을 읽고 씀으로 살아내는 그이니 6월 한 달 서른 편의 글 면면은 다양합니다. 시와 에세이의 뼈대 사이사이 인터뷰와 편지가 있고, 세 편의 짧은 소설도 담았습니다. 다만 꾸림과 벼림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여서일까요, 하루는 시고 다음날은 에세이인 자유로운 흐름 가운데 이것 분명 한 권의 책이고 하나의 이야기구나 알게 됩니다. 어느 꼴이든 이 모두 ‘삶’의 단면인 거지요. 절반을 뚝 자르면 보이는 진짜 얼굴, 때로는 소소하게 때때로 절실하게 살아내어 살아가는 이야기. 그도 분명 그렇겠습니다. 언제나 『좋음과 싫음 사이』에 있는 것, 삶이기도 하니까요.

하루하루 용기를 내어 써나갔다. 빈 문서 앞에서는 늘 용기가 필요하다. 아까 나를 괴롭게 했던 것들이 용기의 뜨거운 원천이 된다. 마흔이 넘었으니 이제 생의 절반이나 왔을까? 삶과 죽음의 경계를 함부로 재단할 수는 없지만 평균이라는 걸 따져보니 얼추 그렇다. 지난 절반을 바라보며 용감해졌다. 앞으로의 절반을 내다보며 무쌍해지려 한다. 그다음 다시 손을 펴볼 일이다. 무엇이든 묻어 있으면 좋겠다. ─본문 중에서

좋음과 싫음,
엔딩과 앤드

책 속에는 참 많은 이가 등장합니다. 다운증후군을 안고 태어난 “나의 보호자” 첫째와 나의 ‘쌍둥이’ 둘째, 손맛과 짠맛으로 기억될 할머니, 자랑스러운 나의 소설가 친구만 아니라 “뜻밖에도” 재회한 이십 년 전 만남도 있지요. 고향인 광주, 유년의 공간 사직동, 삶의 터전인 서울 3호선을 따라 살았던 집들과 살 수 없었던 아파트를 지납니다. 그러니까 6월 한 달에 한 시인의 삶, 그 궤적이 통째 담길 수도 있겠습니다. 절반이란 돌아봄에 적절한 때이니까요. 지난 절반을 바라보며 용감해진 시인은 앞으로의 절반을 내다보며 무쌍해집니다. 절반이란 다짐에도 적당한 때로구나 합니다.

많은 시의 끝에 마침표를 찍지 않았습니다. 이어질 듯 끊어진 시는 끊긴 듯 이어지는 날들로 향합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삶에는 언제나 남은 이야기가 있는 거지요. 그 모두 끝없고 어김없는 질문들이어서, 답과 답 아닌 것들 사이에서 갈팡질팡 혹은 우왕좌왕 흔들리거나 흐르거나 합니다. 그러나, 그러므로 다음이 있는 것이겠지요. 좋음 혹은 싫음으로 딱 떨어지지 않고 뚝 맺지 않는 질문으로 시인은 다음을 살고 다음을 씁니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 하루에 두 시간 이상 전철을 타며 나는 어떤 아름다움을 보았는지. 대략 삶은 아름다운 것이라 한강의 윤슬처럼 가볍게 말할 수 있는 것인지. 혹은 삶은 추악한 것이라고 이어폰을 끼고 스마트폰을 내려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처럼 무심히 말할 수 있는 것인지. 광고 패널은 답을 주지 않을 것이었다. 역은 다음 차례의 역을 부르고 시간은 다음 순서의 시간을 부를 것만이 확실했다. 손잡이를 잡지 않고도 전철에 잘도 서 있는 사람들처럼 끝내 이동하며 살 것이었다. 답을 쉬이 찾지 않으며, 답을 믿지 않으며, 그러나 답을 갈구하며. ─본문 중에서

가끔은 슬플 것 같습니다
그래도 좋을 것 같습니다

시인에게 야구를 좋아하는가 물으면 “네니요”라 대답합니다. 아픈 아이의 보호자가 되는 일은 아이로부터 보호받는 일이기도 합니다. 아버지를 온전히 사랑할 수도 미워할 수도 없고, 고향이란 언제나 복잡하게 슬프고 온전히 자랑스러운 나의 동네입니다. 이토록 삶은 헤아릴 수 없이 복잡한 것. 그것은 사는 동안, 죽을 때까지 그러할 테고요.

물이 반이나 남았네 혹은 물이 반밖에 안 남았네. 물 절반 담긴 잔 앞에서, 물 대신 흔들리는 것 아무래도 마음이고 삶입니다. 다만 기왕 떠둔 물이니까요, 좋지만도 싫지만도 않은 삶의 가운데, 시인을 따라 지난 절반과 앞으로의 절반, 두 손바닥 반씩 모아 기도할 수는 있겠습니다. 복잡하고 혼란한 삶의 한가운데서, 오직, 평화를 빕니다.

이건 우리 둘째(또!) 이야기. 녀석은 요즘 죽음에 골똘하다. 멀쩡하게 주말을 보내놓고는 잠들기 전에 엄마도 아빠도 언젠가는 죽는 게 아니냐며 운다. 구슬프게 울다 잠든다. 그럴 때마다 나는 제우스의 아들과는 다르게 생의 의지가 솟구친다. 아프지 말아야지 다짐도 한다. 결국은 불가능한 일인 걸 뻔히 알면서도 그렇게 한다. 그럴 때 삶이 싫지만은 않지만, 언젠가 끝날 거니 마냥 좋은 건 아니다. 그저 그 사이에 있다.

하지만 당신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복잡하고 혼란한 삶의 한가운데서, 오직
평화를 빕니다.


 

*플레이 리스트도 들어 보세요.

https://youtu.be/oQWx5Jd3NUg?si=IR2GnsXwr5BpsmGr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