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 한자, 마음을 읽는 글자 / 1편. 愛(사랑)
한자는 학교에서 외워야 할 시험 과목이었다.
검은 먹으로 써 내려가던 획 사이사이에
나는 아무 감정도 품지 못했다.
그냥 외웠고, 잊었고, 넘겼다.
그런데 아빠가 되고 나서,
한자를 다시 보기 시작했다.
아이에게 무언가를 가르치려 하던 순간,
내가 몰랐던 것들을 되돌아보게 되었고,
그때 가장 먼저 떠오른 글자가 있었다.
‘愛’였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마음’을 ‘받치는’ 것이라는 설명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말없이 무릎을 쳤다.
그건 바로 부모의 마음이었다.
어릴 적 나를 위해 새벽을 지새우던 아버지의 등,
내가 아프면 그보다 더 아파하던 어머니의 눈빛.
그 모든 마음들이,
이 작은 글자 하나 안에 들어 있었다.
아이와 함께 책을 읽으며,
놀이터에서 대화를 나누며,
주말 아침 거실에서 차를 마시며
우리는 한자 한 글자를 천천히 바라본다.
그저 한 글자인데,
거기엔 하루치 대화가 담긴다.
엄마에 대한 마음,
친구와의 갈등,
자신이 느끼는 감정의 실마리까지
모두 한자의 그림자 속에서 떠오른다.
나는 아이에게 무엇을 남기고 싶은가.
무엇을 전하고 싶은가.
그 답을 찾다 보니
‘한자’라는 오래된 친구가 다시 손을 내밀었다.
글자는 단어가 아니라 관계이고,
암기가 아니라 기억이며,
이해가 아니라 공감이었다.
이 책은 한자를 가르치려는 책이 아니다.
아이와 함께 한 글자에 담긴 삶을 이야기하고,
함께 바라보고,
서로의 마음을 읽으려는 시도다.
아이가 조금씩 커가고,
나는 조금씩 느려지고,
우리는 함께 앉아 글자를 본다.
그 사이의 시간이 쌓여,
이 책 한 권이 되었다.
“아빠, 사랑은 눈에 보여?”
아이의 물음은 어느 날 저녁,
내가 밥상을 차리던 순간 시작되었다.
나는 잠시 젓가락을 멈췄다.
“글쎄… 사랑은 마음으로 보는 거 아닐까?”
아이의 얼굴에는 이해와 의문이 동시에 떠올랐다.
“마음으로?”
“응, 가끔은 눈에 안 보여도 느낄 수 있는 게 있어.”
그날 밤, 아이와 함께 ‘愛’라는 글자를 펼쳤다.
마음 ‘心’에 받칠 ‘受’.
‘사랑’은 마음을 바치고 품어주는 것.
나는 그렇게 설명했다.
아이는 작은 손으로 종이에 ‘愛’를 따라 썼다.
서툰 획이지만, 그 속엔 집중이 있었다.
“아빠, 받친다는 건 뭐야?”
나는 아이를 무릎에 앉히며 말했다.
“이렇게 안아주는 거, 네 마음이 다치지 않게 바쳐주는 거야.”
아이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사랑은 안아주는 거구나.”
그 말이 어쩐지 고마웠다.
그날 이후, 아이는 자주 사랑을 확인했다.
“아빠, 나한테 사랑해?”
“당연하지.”
“얼마나?”
“무게로 재면 지구만큼.”
“그럼 달은?”
“두 개쯤?”
우리는 이렇게 사랑을 웃으며 주고받았다.
학교에서 친구와 다툰 날,
아이는 내게 물었다.
“사랑하는 친구한테는 참아야 해?”
나는 다시 ‘愛’를 꺼냈다.
“참는 것도 사랑일 수 있어.
하지만 억지로 참는 게 아니라
이해하려는 마음이 더 중요해.”
“그럼, 때리면?”
“그건 사랑이 아니지.
사랑은 다치게 하지 않아.”
아이와 나는 주말마다 작은 글씨 연습장을 꺼냈다.
'愛'라는 글자 하나로 이야기꽃이 피었다.
우리는 때로 붓펜으로,
때로는 색연필로 그 글자를 그렸다.
사랑은 점점 우리 사이에 자리 잡았다.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순간이 생겼다.
아이가 나를 안고,
내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는 것만으로도
그 뜻이 오갔다.
하루는 아이가 말했다.
“아빠는 사랑을 주는 사람 같아.”
“왜 그렇게 생각했어?”
“항상 나를 기다려주고, 안아주고, 화내지 않으니까.”
나는 그 말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고개만 끄덕였다.
그날 밤, 아이는 내 품에서 잠이 들었다.
작은 입가에 웃음이 맴돌았다.
나는 조용히 속삭였다.
“사랑해.”
아이는 눈을 감은 채로 중얼거렸다.
“나도.”
그렇게 우리는 ‘愛’라는 글자 안에서
하루를 마무리했다.
며칠 후, 아이는 숙제를 하다 말했다.
“선생님이 사랑을 설명해 보래.”
나는 물었다.
“어떻게 설명하고 싶어?”
“글자로는 어렵고… 행동으로 하면 안 돼?”
“어떤 행동?”
“아빠가 나 기다려주는 거. 그런 거.”
나는 잠시 가슴이 먹먹했다.
아이의 말은 짧지만 깊었다.
사랑을 보여주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설명보다 실천이라는 것을
그 작은 말 안에서 다시 깨달았다.
다음 날, 아이는
‘사랑은 마음을 꼭 안아주는 것’이라고 써서 냈다.
선생님이 “예쁘다”라고 말해줬다고
아이 얼굴에 햇살 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우리는 거실에 ‘愛’라는 글자를 크게 써서 붙였다.
“이건 우리 집의 마음 글자야.”
아이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지나갈 때마다 손으로 가볍게 쓰다듬었다.
“오늘도 사랑해요.”
나는 그 순간을 오래 기억하고 싶었다.
어쩌면 ‘愛’라는 글자보다 더 깊은
우리만의 의미가
그 안에 담긴 것 같았다.
“아빠, 어떻게 하면 믿을 수 있어?”
사랑을 배운 아이는 이제 ‘믿음’을 묻기 시작합니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
기다려주는 것,
마음을 지켜주는 것.
한 글자 '信' 안에
우리는 신뢰와 실망, 약속과 기다림을 담아 봅니다.
아이에게 믿음을 가르치려다,
나의 부족한 믿음을 돌아보게 된 하루.
다음 이야기
2편. 信 – 믿음은 시간을 건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