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원동력
언젠가 편찮으신 외할머니를 간호하기 위하여 대학병원의 입원실에서 적지 않은 시간을 보냈을 때가 있었다. 며칠 동안은 버텨볼 만했으나 시간이 갈수록 견디기가 힘들었다. 날 힘들게 했던 것은 환자를 돌보아야 하는 체력적인 부분만이 아니었다. 질병과 상처 앞에서 무력해져 가는 누군가의 인생을 옆에서 지켜보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그렇게 고된 삶을 살아왔음에도 결국은 죽음 앞에 또다시 무력해질 수밖에 없는 인간 삶의 허무함과 덧없음이 너무 크게 와 닿았다. 병원이라는 곳은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고군분투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시간을 담고 있었다. 고통을 견디는 환자들뿐만 아니라 그들을 옆에서 밤낮으로 지키는 보호자들, 잠을 자는 시간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수없이 병실을 오고 가는 의료진들이 있었다.
병원 생활 동안 나는 수많은 사람들을 지켜보며 삶과 죽음, 인간 존재의 의미에 대한 많은 생각에 빠지곤 했다. 각자에게 삶과 죽음은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음을 알고 있는 이에게 삶과 죽음은 어떤 의미일까? 이들은 어떤 것에서 삶의 의미와 희망을 발견하고 있을까? 수많은 질문들이 머릿속을 오고 갔다. 하지만 입 밖으로 내뱉을 수는 없었다. 내가 가진 질문들이 무색해질 만큼 인간이 가장 연약한 모습들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곳이 병원이었기 때문이다. 고통이 끊임없는 이곳에서 그런 질문은 사치였다.
병실에 누워 계신 외할머니의 모습을 많이 살펴보았다. 할머니의 키가 언제 이렇게 작아진 걸까. 내 유년 시절의 기억 속에서 키가 크고 참 고왔던 할머니는 이제 나보다 훨씬 작은 키에 마르고 연약한 노인이 되어있었다. 진통제로도 해결이 안 되는 신경계 통증을 이를 악물고 버티는 할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슬픔이 너무나 컸다. 그 통증을 참고 있는 할머니도 대단했다. 누구도 해결해 줄 수 없는 자신만이 알고 있는 고통. 할머니는 절대 참을 수 없는 것도 참아내는 굉장한 분이었다. 그러면서 늘 괜찮다고 했다. 이번에도 그랬다. 내가 힘들어할까 봐 건조해서 다 터진 입술을 꽉 물고 참는 모습이 더 고통스러웠다.
“할머니, 아프면 아프다고 말해도 돼요. 아픈데 왜 안 아프다 그래.”
나를 엎어 키웠던 우리 할머니. 할머니는 언제나 변함없이 똑똑하고 강한 분일 거라고 생각했다. 늘 내가 기댈 수 있고 언제든지 나의 버팀목이 되어줄 수 있는 분. 그런데 질병의 고통은 사람을 점점 피폐하게 만들었고 시간이 흐를수록 할머니는 점점 아기처럼 변해가고 있었다. 할머니는 가족들이 함께 있음에도 불구하고 병실에서 내가 보이지 않으면 불안해하며 계속 찾았다. 그 시간들이 사실 많이 버거웠다. 늘 내가 의지했던 누군가가 이제는 나에게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한편으론 너무 이상했고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할머니가 진통제를 맞고 몇 시간이라도 겨우 주무시기 시작한 어느 날 밤, 잠시 병실을 벗어나 혼자 병원 밖 벤치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한겨울이라 밤공기가 쌀쌀했지만 고요함이 너무나 그리웠을 때라 상쾌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벤치에 앉아 멍하니 있다가 계속 보는 할머니인데도 할머니 생각이 났다.
할머니와 함께 했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매년 이맘때 감기에 잘 걸리는 나를 걱정해서 할머니는 배 달인 물을 항상 만드셨다. 애지중지하는 손녀딸,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어디가 아플까 힘들까 걱정하던 수없이 많은 세월들을 홀로 보내고 있었던 할머니였다. 그런데 나는 고작 얼마 되지도 않은 시간들을 가지고 힘들다며 불평하고 있었다. 내리사랑이라는 것은 참 슬픈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추억이 되어버린 과거의 시간들처럼 지금 이 시간도 내가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는 추억이 될 거라고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해졌다. 더 이상 할머니를 볼 수 없을 날이 언젠가는 오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 시간의 흐름이 참 잔인하다고, 인생은 참 눈치도 없이 빠르게 흘러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벌떡 일어나 나를 찾을지도 모르는 할머니를 생각하며 병실로 들어갔다. 작은 조명 하나 켜놓은 병실은 할머니가 주무시는 거친 숨소리로 가득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 나이 또래로 보이는 간호사 선생님이 오셔서 링거를 확인하고 할머니의 열을 확인했다.
매일 몸과 마음이 아픈 사람들을 만나는 직업은 어떤 마음 가짐을 가져야만 하는 걸까? 궁금하여 묻고 싶었지만 묻지 않았다. 대신 인사를 했다.
“항상 고생 많으세요. 힘드실 텐데 매번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병원에서 이런 인사를 듣는 것이 생소한 일인지 간호사 선생님이 되게 감동받은 표정을 지으시며 나가셨다. 평소에 누군가에게 충분히 감사할 수 있는 일들도 병원이라는 공간 안에서는 감사할 수 있지 못했다. 모두가 치열했고 날이 서 있었다. 삶이란 참 모순적이지만 또 신기했다. 병을 치료해주는 사람도 병을 치료받기 원하는 사람도 그 옆에서 환자를 돌보는 사람도 모두 삶의 목적은 다 동일했다. 살기 위함이었다.
인간은 모두 죽음이 예견되어 있는 존재이다. 언제 이 생을 다할지는 모르지만 시간의 간격만 있다 뿐이지 우리 삶의 끝은 결국 죽음이라는 마지막 관문을 남겨두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살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우리의 끝을 알고 있음에도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내기 위하여 무던히 노력한다.
존재의 의미란 그렇다. 내 존재의 탄생이 있듯이 내 존재의 끝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매 순간 의미를 찾기 위해 노력한다. 내가 존재하는 이 시간이 나에게 가져다주는 의미, 이 시간 속에 존재하는 나의 의미. 의미의 등가교환이다. 어쩌면 이 땅 곳곳에 숨어있는 의미들을 발견하는 재미와 성취로 인하여 삶의 끝이 있음에도 끝없는 의미 찾기를 이어간다. 이 땅의 삶이 끝나고 그 이후의 삶에도 의미를 둔다. 의미 없이는 우리는 존재할 수 없다. 곧 우리는 의미로 만들어진 존재들이다.
삶이 가져다주는 현실이 아무리 고달프다고 할지라도 그 속에서 발견하는 의미와 진리들이 우리의 삶을 계속해서 굴러가게 만들며 희망이라는 것을 선물한다. 신은 인간을 말씀으로 창조했다. 인간의 근원은 사랑의 의미를 가득 담은 신의 말씀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렇기에 우리는 의미를 찾을 수밖에 없으며 서로 사랑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 살아간다.
지금 이 순간이라는 것은 짧은 찰나의 순간이다. 눈 한번 깜빡하면 흘러가는 일분일초가 절대 돌이킬 수 없는 과거가 된다.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는 과거를 추억하고 그리워하는 것은 현재의 나에게 주는 의미들이 있기 때문이다. 고된 삶을 버텨낼 수 있는 힘은 의미 있는 시간들이 모여 만들어낸 기억들이다. 그 기억들의 주인공이 될 지금 내 옆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에게 의미 있는 말 한마디를 건네보자. 먼 훗날 다시는 돌아갈 수도 돌이킬 수도 없는 그때를 그리워할 때, “내가 그때 그렇게 이야기하길 참 잘했어”라고 안도할 수 있는 오늘을 살아가기를. 지금 내가 누군가에게 건넨 따뜻한 말 한마디가 내 삶의 아름다운 기억의 한 부분이 되길 바란다.
존재의 의미란 결국 나와 타자가 함께 숨 쉬며 서로에게 기댈 수 있었던 의미 있는 기억들이 만들어가는 것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