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속도를 유지하는 삶
어릴 적의 나는 행동이 느린 아이, 뭐든지 천천히 하는 아이였다. 내 행동이 느리다는 것을 적어도 내가 알고 있던 내 세상에서는 미처 몰랐었다. 여러 명의 친구들과 함께 음식을 먹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또래의 아이들이 자기의 몫을 다 먹고 남의 몫을 탐하고 있을 때도 나는 내 몫으로 주어진 음식의 반을 겨우 먹고 있는 아이였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이상하다거나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내가 느리게 먹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고 생각했었고 다른 아이들이 나보다 빠르게 먹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각자의 속도대로 먹는 것이니 이상할 것이 전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른들은 그런 나를 보며 “그렇게 느려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려고 하니?”라고 말씀하셨다.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니었지만 나에게 큰 영향을 주진 못했다. 나는 좀 느린 사람이라는 것을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었고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들이 무언가를 다 취하고 난 이후에야 내 몫을 챙기는 그런 아이였다. 하지만 내가 좋은 것을 몰라서 가지지 않거나 단지 느려서 빼앗기는 것은 아니었다. 나에게는 타인이 무언가를 먼저 취하도록 기회를 제공하는 양보이자 배려의 의미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주변의 어른들이 나에게 하는 소리는 비슷했다. “쟨 너무 느려서 다른 애들한테 다 빼앗기잖아.”, “그렇게 착하게 다 양보하면 바보인 줄 알아.”, “자기 것을 챙길 줄 알아야지.” “그렇게 착하게 살면 너 앞으로 커서 잘 못 산다.” 난 이 말들이 너무 이상했다. 내가 느린 것이 잘못되었다고 했고 내가 양보하는 것도, 착하게 사는 것도 모두 잘못된 것이라고 했다. 나의 느린 행동에 대해서 지적하는 것은 앞서 이야기했듯이 사실 큰 영향을 받지 않았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을 위해주고, 착하고 바르게 사는 것이 옳다고 생각해왔던 내 세상의 기준이 잘못된 것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배려하고 착한 삶을 사는 것이 맞다고 배워왔고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또 그렇게 사는 게 잘못되었다고 하고 바보라고 했다. 내 세상에서는 하나도 문제 될 것이 없었던 내 행동들이 어른들의 세상에서는 문제 투성이로 살아가는 행동이었다. 그래서 나는 어른들의 이야기가 나에게 충격을 주고 그 말이 귓가에 맴돌며 의식되기 시작한 순간부터 내 느린 행동을 바꾸고자 안간힘을 썼다. 배려하는 것,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착하게 살고자 하는 것은 내 양심이 바꾸지 못하는 절대적인 기준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잘못의 원인을 모두 나 자신에게서 찾았다. 내 느린 행동이 모든 잘못이라 여기며 빠른 사람이 되고자 집중했다.
다시 정신을 차려보니 성인이 된 나는 어느샌가 빠른 사람이 되었다. 음식을 먹는 속도도 사람들의 평균적인 속도에 비해서 월등히 빨랐으며 음식을 먹는 양도 보통의 사람들이 먹는 양에 비해 월등히 많았다. 모든 생활 습관이 빠른 것에 적응되어 있었고 느린 것을 견딜 수가 없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에너지를 빠르게 또 많이 사용하다 보니 방전의 상태가 비교적 금방 찾아왔다. 공허하고 무기력했으며 허무한 상태가 지속되었다. 어느 날 ‘내가 지금껏 빠르게 또 많은 것들을 해오면서 내가 얻은 건 무엇일까? 또 잃은 것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주었다. 얻은 것을 생각해 보았다. 타인으로부터의 인정과 칭찬이 있었다.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긍정적인 평가들이 많았다. 잃은 건 뭐지? 내 속에 아무것도 없었다. 내 속은 채워져 있는 것이 하나도 없이 공허했다.
빠른 속도와 많은 양에 집중해왔다. 타인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내 삶의 전부였던 시절도 거쳐왔다. 그리도 복잡하게 살 수가 없을 만큼 복잡하게 살았다. 신속하게 최대한 많은 양을 작업해야 하는 공정일수록 기계가 복잡하게 설계되어 있듯이 나는 그런 삶을 살아왔다. 빠르게 살기 위하여 복잡한 생각들을 해왔고 타인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결과물들을 만들기 위하여 씨름했다. 초점은 모두 나를 위함이 아니라 바깥을 향해 있었다. 타인의 평가와 시선들이 의식되기 시작한 순간부터 느림의 미학이란 내 인생에 존재하지 않았다.
수명이 다한 배터리를 새 배터리로 갈아 끼우는 것은 어려웠다. 내가 본래 느린 사람이라는 것을 다시 기억해내는 것에는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내가 그런 사람이었던가?’라고 생각할 정도로 본래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대한 기억을 다 잃은 것 같았다. 삶의 아주 사소한 습관들 조차도 내가 어떻게 해왔던 것인지를 완전히 잃어버린 상태였다. 말 그대로 모든 것이 공허했다. 다시 무언가를 시작하고자 하는 열의가 없었다. 어떤 것으로도 나를 자극하지 못했다. “다시 처음부터 천천히 해보자.”라고 애써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내 마음 한편에서 ‘빠르게 하지 않으면 혼자 뒤처진다.’, ‘난 이미 뒤처진 사람’이라는 마음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불안했다. 세상은 너무나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고 나를 제외한 모두가 다 세상에 발맞추어 살아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는 애써 내디딘 발걸음을 멈추고 불안한 외줄 위에 걸터앉았다. 어떤 방법으로도, 누구도 나에게 자극을 주지 못하였다.
어느 날 또 나에게 물었다. ‘다시 시작하기엔 늦은 걸까?’, ‘지금 나는 뭘 해야 하지?’ 결론은 쉽게 내려지지 않았다. 생각보다 어려운 질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다른 질문이 문득 떠올랐다.
‘지금 난 뭘 하고 있지?’
내 자신이 한 질문에 스스로 묻고 답하기를 반복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있지.’
‘아니, 지금 내가 진짜 하고 있는 행동 말이야.’
‘숨을 쉬고 있지.’
‘숨을 쉬고 있다고?’
‘응, 숨을 쉬지.’
‘왜 숨을 쉬는 건데?’
‘당연한 거니까. 사람이 숨을 안 쉬고 어떻게 살아?’
그랬다. 난 숨을 쉬고 있었다. 숨을 안 쉬면 사람이 살 수 없다. 정말 단순하고 별거 아닌 질문과 대답이 내 어딘가를 자극했다. 그래, 사람은 숨을 쉬어야 해.
그래서 난 숨을 쉬려고 노력했다. 답답하고 공허함이 가득 차 있던 내면에 숨을 불어넣고자 했다. 그래서 아주 느리지만 또 천천히 숨을 쉬어보자고 생각했다. 숨을 쉬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것이 사람이니까 누구든 무슨 이유라도 반드시 숨을 쉬어야만 한다. 아이의 세상에서는 배려가 되는 지극히 당연했던 것들이 어른의 세상에서는 손해가 되었다. 아이의 세상에서는 사람은 숨을 쉬어야 사는 것이라는 생각이 어른의 세상에서는 숨을 쉬면 한심한 사람, 뒤처지는 낙오자가 되어버렸다. 우리는 이 모든 세상을 거쳐왔고 또 지금의 세상을 살아간다. 세상의 템포는 빠르다. 그렇기 때문에 정확하고 신속하게 무언가를 하는 것은 중요한 책임이 되었다.
그러나 정확하고 빠른 것이 나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지 한 번쯤은 질문해볼 법하다. ‘나를 위한 것인가? 나를 제외한 다른 이들을 위한 것인가?’
인생의 중요한 모든 결정들은 빠르고 정확한 한 가지의 선택을 필요로 하지만 그 선택을 위하여 필요한 안목과 가치관을 갖추기 위해서는 나를 천천히 살피는 단순함과 느림이 있어야만 한다. 삶을 원활하게 움직이도록 하는 정확성과 속도의 관계는 정해져 있지 않다. 비례와 반비례의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 유일한 것은 우리의 삶이 가져다주는 깨달음이다. 삶을 살아내고 호흡하도록 만드는 깨달음에는 정해진 공식이 없다. 그래서 나는 되새겼다. 타인에게 인정받는 눈에 보이는 어떠한 결과물도 없고, 오늘의 고민과 내일에 대한 불안으로 막막하고, 삶에 어떠한 진전도 없는 것 같아 보이더라도 빠른 사람은 되지 말자고. 나는 본래 느린 사람이라는 것을. 그래서 어른의 세상에서 좀 느리고 손해보고 더 양보하더라도 내 자신에게 숨을 쉴 수 있는 편안함을 주는 사람이 되어보자고.